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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주 김영사 대표이사 사장 |
박은주 김영사 사장이 25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영사는 2일 박 사장이 출판유통과 관련한 회사 내부문제와 사재기 의혹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고 밝혔다. 박 사장은 이날 한국출판인회의 회장도 사임했다.
박 사장은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기획한 국내 출판계의 대표적 전문 경영인이다. ‘미다스의 손’, ‘기획의 여왕’, ‘출판계의 신데렐라’ 등 박 사장의 별명이 그의 화려한 이력을 말해 준다.
박 사장의 사퇴를 두고서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있었던 사재기 파문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출판사 직원들은 경영악화로 사실상 경질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진짜 사퇴 이유는?
표면적으로 알려진 박 사장의 사퇴 이유는 김영사 내부 문제와 사재기 파문이다.
김영사는 최근 유통과 마케팅과 관련한 내부문제가 불거져 4월 말부터 자체적으로 내부조사를 벌여왔다. 이 과정에서 간부 2명이 대기발령을 받았고 몇몇 직원들에 대한 인력 구조조정이 진행중이다.
또 지난달 한 서적도매업체가 김영사의 자회사인 '김영사온'에서 펴낸 책을 직원들에게 사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출판유통심의위원회가 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사재기 논란이 직접적 사퇴원인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영사가 직접 관여한 것도 아닌 데다가 10권 미만의 작은 규모이기 때문이다. 일부 출판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그게 사재기라면 사재기를 하지 않은 책이 없을 것”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다. 또 그 책은 베스트셀러에 오르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사재기 의혹이 김영사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박 사장이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으로서 도덕적 책임감을 느껴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영사 내부 직원들은 경영악화가 진짜 원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2010년 474억 원에 달했던 김영사의 매출이 2013년 277억 원까지 떨어졌다. 특히 중국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실패로 귀결되면서 박 사장이 사퇴압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사 관계자는 지난 4월1일부터 창업주인 김정섭 전 사장이 회장직에 복귀한 것은 실적악화에 따른 경영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회장은 지난 1989년 박은주 당시 편집부장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5년 만에 복귀했다.
그러나 출판업계의 실적부진이 김영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출판계 전체의 문제인 만큼 경영악화가 직접적인 사퇴원인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 출판계의 신데렐라이자 미다스의 손
박 사장은 1989년 만 31세의 나이에 김영사의 사장이 됐다. 편집자 출신으로 김영사에 입사한 지 7년 만에 출판업계 최초의 여성 경영자(CEO)가 됐다. 그는 취임 첫해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를 냈다. 이 책은 출간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려나가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됐다.
그뒤로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1994), ‘정의란 무엇인가'(2010), ‘안철수의 생각’(2012) 등 베스트셀러를 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며 성공신화를 이어갔다.
박 사장은 출판계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사장이 된 지 10년 만에 김영사를 연매출 100억 원이 넘는 회사로 키워냈다. 학습지나 전집물 출판사가 아닌 일반단행본 출판사가 매출 100억 원을 넘는다는 건 대단한 기록으로 통한다. 이후로도 김영사는 성장을 거듭해 2012년 연매출 400억 원을 넘어섰다.
박 사장은 1957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 평화출판사 편집부에서 출판 일을 시작했다. 이후 당시 김영사 사장이던 김정섭 회장에 의해 직접 영입돼 1982년 김영사에 발을 들여놨다.
김영사는 1990년대 초 출판시장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회과학서적의 판매가 뜸해졌고 이후 교양 과학서와 경제경영서가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박 사장은 이러한 흐름을 이끈 주역으로 꼽힌다.
박 사장은 출판계에서 “촉수가 예민한 경영자”라는 평을 들었다. 특히 2010년 우리 사회를 강타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출간할 때 박 사장은 당시 출간예정 목록만 보고 ‘Justice(정의)’라는 제목에 끌려 저자가 책을 쓰기도 전에 계약을 맺기도 했다.
1993년 대선 패배로 영국에 가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몇 번이나 찾아가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라는 원고를 받아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 사장은 지난해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을 맡았다. 이후 박 사장은 도서정가제 법안 마련, 출판문화진흥기금 조성 등 출판계 숙원을 해결하고자 노력해 왔다. 지난 4월 도서정가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도 박 사장의 공이 컸다. 그는 정관계 인사를 직접 만나며 도서정가제의 필요성을 설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사장은 지난해 3월 “임기 2년 내 5천억 원 규모의 출판문화진흥기금을 조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겠다”고 밝혔지만 회장에서 물러나면서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됐다. 박 사장은 동네서점 활성화와 공공도서관 설립 확대 등에 힘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