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반도체업계 안팎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미국 백악관에서 열리는 반도체회의를 계기로 글로벌 반도체시장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에 붙이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월 반도체와 전기차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등 4대 핵심품목의 조달망을 점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우표보다 작은 이 반도체칩은 21세기의 말편자 못에 해당한다”며 “우리와 이익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나라(중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를 포함해 이날 회의에 참여하는 모든 기업들은 상당한 부담감을 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전자는 한국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회의 참석 명단에 포함됐다.
브라이언 디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뿐만 아니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회의를 공동주재한다. 심지어 백악관이 공개한 일정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까지 회의에 참석한다.
회의 주재자로 경제위원장과 안보보좌관을 동시에 참가시켰다는 점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단순히 산업적 관점을 넘어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반도체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의 반도체 조달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글로벌시장에서 중국에 반도체 조달능력의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내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백악관 반도체 회의는 참여 기업들에 미국 반도체 투자를 권고하는 장이 될 수 있다”며 “백악관은 투자를 확대하는 기업에 세제혜택이라는 당근을, 투자하지 않는 기업에 미국 반도체 밸류체인에서의 배제라는 채찍을 꺼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에서 텍사스주 오스틴에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모두 170억 달러(19조 원가량)의 파운드리 투자를 진행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텍사스주뿐만 아니라 뉴욕주, 애리조나주 등과 보조금 등 세제혜택의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증권업계에서는 백악관 반도체회의와 기존 투자계획이 맞물려 삼성전자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김영우 SK증권 연구원은 “미국 반도체 제조경쟁력 강화를 위한 적극적 지원이 현실화하면 삼성전자는 TSMC와 함께 최대 수혜를 보는 기업이 될 것이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상당히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고 보는 시선도 만만찮다.
미국이 이번 회의를 글로벌 반도체시장에서 중국에 조달능력의 우위를 점하는 계기로 삼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삼성전자가 이 계획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삼성전자는 미국에서 투자를 확대하거나 또는 투자에 속도를 내는 것만으로도 중국으로부터 미국에 ‘줄을 댔다’는 시선을 받게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삼성전자가 2020년 낸 매출 166조3112억 원의 26%인 43조7403억 원이 중국에서 나왔다. 삼성전자로서는 중국에서의 사업이 축소되거나 어려워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를 빌미삼아 중국에도 적정규모의 투자를 권고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백악관과 마찬가지로 이 권고가 현실화한다면 삼성전자로서는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삼성전자는 중국에서도 투자를 한다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메모리 생산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2공장의 증설투자를 마무리한 상태이며 올해 하반기 양산 가동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낸드플래시공장의 추가 증설 정도라면 삼성전자로서도 그다지 부담스러운 투자는 아닐 수 있다. 삼성전자는 2012년 시안 낸드플래시공장 건설계획을 처음 내놓을 때부터 시장 상황에 맞춰 단계적으로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현재 글로벌 반도체 수급난은 메모리반도체가 아닌 시스템반도체, 그것도 비교적 수익성이 떨어지는 차량용 반도체나 가전용 반도체 등 8인치 웨이퍼 반도체의 공급 부족현상이라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수익성을 고려해 컴퓨터나 모바일기기 등에 쓰이는 12인치 반도체에 주력하고 있다. 오스틴 파운드리공장도 12인치 반도체 생산기지다.
글로벌 반도체시장의 수급 상황을 고려해 백악관이 12인치 반도체가 아닌 8인치 반도체의 파운드리 투자를 삼성전자에 권유할 가능성도 나온다.
여기에 중국까지 8인치 파운드리의 신규투자를 요청한다면 삼성전자로서는 주력사업인 반도체에서 수익성을 확보하는 데 차질이 생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