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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생산적금융을 묻다 은행①] 글로벌 자본 모이는 '신뢰의 우산' 만든 싱가포르, 규제가 주는 자유로움의 역설을 느끼다

박혜린 기자 phl@businesspost.co.kr 2026-06-15 16:5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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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재명 정부의 핵심 금융정책을 꼽으라면 단연 ‘생산적 금융’이다. 생산적 금융은 금융회사 자금이 이자장사에 그치기 쉬운 부동산 등 담보대출에 머물지 않고 첨단전략산업, 벤처창업시장, 녹색금융, 지방금융 등 국가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는 생산적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는 금융대전환을 말한다. 싱가포르는 아세안은 물론 아시아를 대표하는 금융선진국으로 생산적 금융 측면에서도 배울 점이 많은 국가로 꼽힌다. 비즈니스포스트는 싱가포르의 금융이 발휘하고 있는 경쟁력을 직접 느껴보고 K생산적금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직접 모색해보고자 한다.

-은행 글 싣는 순서
① 글로벌 자본 모이는 '신뢰의 우산' 만든 싱가포르, 규제가 주는 자유로움의 역설을 느끼다
② KB국민은행 싱가포르지점장 김용진 “자본시장 상품 역량 차별화로 역외시장 정조준, 동남아 금융거점 만든다"
③ 신한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정형동 "글로벌 은행 경쟁 속 자본·인력 2배로 체급 키워, 아시아 리딩뱅크 꿈 키운다"
④ 하나은행 아시아지역본부장 박영민 “53년 현지화 네트워크 강점, 기업금융에서 리테일까지 ‘글로벌 하나’ 힘 싣는다”
⑤ 우리은행 싱가포르지점장 양승용 "발로 뛰는 영업·내부통제로 시장 신뢰 확보, 지속성장 내실 다진다"
⑥ 이도형 한국수출입은행 싱가포르법인장 "정책금융은 경쟁보다 보완, 아시아 허브에서 한국 금융영토 넓힌다"

[K생산적금융을 묻다 은행①] 글로벌 자본 모이는 '신뢰의 우산' 만든 싱가포르, 규제가 주는 자유로움의 역설을 느끼다
▲ 싱가포르의 대표적 랜드마크 '멀라이언' 동상이 있는 마리나베이에서 바라본 도심 금융지구 빌딩 모습. 싱가포르에는 글로벌 은행과 운용사, 증권사 등 600여 곳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싱가포르=비즈니스포스트] '잘 정돈된 계획 도시.'

6월9일부터 13일까지, 한국의 생산적금융이 배울 점을 취재하기 위해 일주일 가량 싱가포르에 머물며 받은 인상이다.
 
습기를 가득 머금어 바람마저 무겁던 6월 초 싱가포르가 안겨 준 인상은 아이템을 하나하나 장만해 공들여 만들어 놓은 게임 속 도시처럼 ‘단정’했다.

4차선·5차선의 넓은 도로를 나란히 한 방향으로 달리는 차들, 현대식 고층 빌딩들 사이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가로수와 세련된 도시 조경, 갑자기 쏟아지는 비와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지붕 있는 보행로까지.

이처럼 꼼꼼하게 만들어진 도시는 금융시장의 규제 역시 촘촘하기로 유명했다.

싱가포르는 자금세탁방지(AML)와 고객확인제도(KYC), 컴플라이언스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감독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엄격하다. 싱가포르가 '태형'으로 유명한 것처럼 금융부문 역시 규제나 법을 지키는 부분에 있어서는 적당히가 없다. 

그럼에도 글로벌 자본은 계속 싱가포르로 모여든다. 

일관되고 엄격한 규제가 오히려 사업의 불확실성을 낮춰주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통화청(MAS)이 중앙은행과 금융감독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 규제의 일관성이 보장된다. 의사결정 체계가 통일돼 혁신과 신상품 도입도 빠르다.

실제 싱가포르 현지에서 만난 금융권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정치와 법률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한 규제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싱가포르 금융 생태계의 강점이라고 말이다.

양승용 우리은행 싱가포르지점장은 “싱가포르는 리스크를 중심에 둔 경영관리와 실질적 내부통제를 강하게 요구한다”며 “하지만 결국 규제는 제약이 아니라 글로벌 영업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K생산적금융을 묻다 은행①] 글로벌 자본 모이는 '신뢰의 우산' 만든 싱가포르, 규제가 주는 자유로움의 역설을 느끼다
▲ 6월 평일 오전 신한은행 싱가포르지점이 입주해 있는 싱가포르의 신도심 아시아스퀘어 타워 벽면 대형 스크린에서 경제뉴스가 나오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금융자산 70%는 해외 조달, 글로벌 자본의 교차로 된 싱가포르

글로벌 자금이 마르지 않는 거대한 금융도시를 만든 힘은 규제의 일관성만이 아니다.

싱가포르는 달러 조달이 용이한 금융환경과 영어 사용 문화, 아시아 주요 국가를 연결하는 지리적 위치를 모두 갖추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로 2~3시간이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에 도착할 수 있다. 실제 마리나베이 금융지구 오피스 빌딩 창밖으로 인도네시아 바탐섬이 보인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생산공장 등이 있는 인도 남부 첸나이도 4시간30분이면 간다.

심지어 휴양지로 유명한 센토사 해변의 바닷가에도 한가로운 수평선 대신 수십 척의 대형 상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어 역동적인 무역도시의 정취를 체감할 수 있다.

싱가포르는 전체가 금융과 물류, 무역의 흐름이 만나는 거대한 교차로인 셈이다.

그래서 싱가포르 금융시장의 진짜 고객은 싱가포르 안에 있지 않다.

싱가포르는 금융시장 자산의 약 70% 이상이 해외에서 조달된다. 한국 금융산업이 내수 중심 시장이라면 싱가포르는 해외 자금과 기관이 주도하는 역외 투자 구조가 중심인 전형적 글로벌 자금 허브다.
 
[K생산적금융을 묻다 은행①] 글로벌 자본 모이는 '신뢰의 우산' 만든 싱가포르, 규제가 주는 자유로움의 역설을 느끼다
▲ 유명한 리조트 단지들과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있는 휴양지 센토사섬 해변가 해협에는 한가로운 수평선 대신 대형 상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싱가포르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마리나베이샌즈 호텔과 멀라이언 동상이 자리 잡은 마리나 만에서 바라보는 도심에는 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건, HSBC 등 글로벌 금융사들의 아시아태평양 본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한국에서도 4대 시중은행이 싱가포르를 아시아사업 전략적 거점으로 삼고 있고 기업은행, NH농협은행도 시장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수출입은행,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과 주요 증권사, 자산운용사도 다수 나가있다.

크지 않은 도시 전체가 금융산업 집적단지(클러스터) 같은 느낌을 준다.

박영민 하나은행 아시아지역본부장 겸 싱가포르지점장은 "싱가포르에 직접 와서 보니 금융시장 규모가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며 "한국계 은행들끼리 경쟁하는 시장이라기보다 함께 성장할 기회가 많은 시장"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금융허브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 친화적 정책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싱가포르의 법인세율은 17% 수준으로 세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고 자본소득세와 배당소득세는 사실상 부과하지 않는다. 외환거래 규제도 적어 자본 이동이 자유롭다.

김용진 KB국민은행 싱가포르지점장은 “싱가포르 자체는 첨단산업 생산국이 아니지만 정책적 환경 조성으로 글로벌 생산적금융 투자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에너지기업들의 해외 생산기지와 글로벌 자본을 싱가포르 금융시장으로 유치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K생산적금융을 묻다 은행①] 글로벌 자본 모이는 '신뢰의 우산' 만든 싱가포르, 규제가 주는 자유로움의 역설을 느끼다
▲ 싱가포르 도심 시내의 5차선 일방통행 도로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돈’의 물길 만든 싱가포르, 장기 계획과 과감한 투자로 생산적 미래 키운다

싱가포르는 이렇듯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최고의 무기로 성장했지만, 한편으로는 미래 예측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혁신산업과 스타트업 투자 분야에는 더없이 과감하게 움직였다.

이 역시 성장을 위해서다.

싱가포르 정부는 일찌감치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 기술의 위험을 먼저 떠안고 시장을 만든 뒤 산업이 성장하면 민간에 넘겨주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를 위해 기술 개발 초기부터 규제기관과 연구자, 기업이 함께 참여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정부가 앞장서 혁신산업 투자의 물길을 트면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정부 산하 스타트업 투자기관 SG이노테이트의 통 시엔 후이 이사는 “싱가포르도 시장의 기본 자본 흐름은 한국과 비슷하다”며 “부동산과 은행, 이런 곳으로 자본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말했다.

통 시엔 후이 이사는 “그렇기 때문에 자본의 물길을 틀려면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정부는 경제를 위해 자금이 필요한 곳을 파악하고 새로운 기술과 산업으로 시장 자본이 흘러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가 오늘날 아시아 금융허브가 된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앞서 1965년 말레이연방에서 독립할 때만 해도 자원도, 내수시장도 부족한 도시국가였다. 이에 정부가 직접 항공과 물류, 금융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했고 장기적 계획 아래 인프라와 제도를 구축했다.

지금의 혁신산업 육성도 같은 연장선에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제도로 자본을 끌어들이고 그 자본이 미래 성장동력이 될 새로운 생산적분야로 계속 흘러갈 수 있는 생태계를 설계하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혁신투자가 ‘모험’을 넘어 ‘인내’자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단기 성과보다 장기적 경쟁력에 초점을 맞추고 정부가 시장의 빈 공간을 메우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K생산적금융을 묻다 은행①] 글로벌 자본 모이는 '신뢰의 우산' 만든 싱가포르, 규제가 주는 자유로움의 역설을 느끼다
▲ 싱가포르는 1822년 도시 계획을 세우면서 상업용 건물을 지을 때 보행자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건물 1층 전면에 최소 5피트(약 1.5m) 너비의 개방된 통로를 반드시 확보하라고 법으로 규정했다.  이 '파이브 풋웨이'라는 이름의 시설 덕분에 싱가포르에서는 수시로 비가 내리는 변덕스런 날씨에도 우산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비즈니스포스트>
싱가포르는 원래 임업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다. 도시 조경을 위한 나무도 상당수 수입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수십년 전 심어진 싱가포르 거리의 가로수들은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높게 자라 1년 내내 뜨거운 도시에 그늘을 만들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보타닉가든은 싱가포르의 상징이자 자랑이 됐다.

생산적 금융도 비슷할지 모른다.

오늘 심은 나무는 당장 내일의 그늘을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일관된 정책과 인내자본, 그리고 미래를 향한 투자가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산업과 기업이 자라고 경제의 숲을 이루게 된다.

싱가포르는 지금도 그 숲을 키우고 있다. 박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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