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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
국민연금이 대주주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 무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하고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서 기관투자자와 연기금, 소액주주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중공업 박대영 사장과 삼성엔지니어링 박중흠 사장은 두 회사 합병의 시너지를 적극 알리며 주주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국민연금의 벽에 막히고 말았다.
국민연금은 3분기 말 기준으로 삼성중공업 지분 4.99%, 삼성엔지니어링 5.24%를 보유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보유 지분 전량에 대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주식매수청구권이란 합병 등 주주총회에서 결정된 사안에 대해 반대할 경우 회사에 보유주식을 매수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 ‘큰손’ 국민연금, 높아진 위상만큼 책임도 커져
이번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는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는 변화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최근 기업들에게 배당확대를 요구하는 정부정책에 발을 맞춘 것이기도 하다.
국민연금은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 건에 대해 지난 10월 서면을 통해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주주이익에 반한다며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12월에도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의 분할합병에서 현대하이스코 주가가 매수청구행사가액을 5% 넘게 밑돌자 보유주식 가운데 40% 가량인 198만주에 대해 주식매수청권을 행사한 적이 있다.
국민연금은 주식시장의 ‘큰손’이다. 지난달 말 취임한 최경수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처음 방문한 곳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였다. 최 이사장은 취임하자마자 홍완선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장을 만나 증시활성화 방안을 논의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7월 말 기준으로 453조 원에 이르는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현재 국내 주식시장 투자는 86조9천억 원으로 국민연금이 20% 정도를 차지한다.
기업들도 국민연금의 움직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이 배당확대 등 기업에 압력을 행사할 경우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금융감독원과 국민연금의 최근 공시를 보면 국민연금은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 지분 7.7%를 보유하고 있다. 또 현대차(8.02%), 포스코(7.45%), SK하이닉스(9.3%), 아모레퍼시픽(7.07%) 등 시가총액 상위 기업들의 주요 주주로 올라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그룹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액은 44조8872억 원이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에 대한 국민연금 지분율은 각각 7.43%, 6.99%로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보다 높다.
◆ ‘식물주주’ 국민연금이 달라지나
국민연금은 지난 3월 만도 신사현 대표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 반대의결권을 행사했다. 국민연금은 만도 지분 13.41%를 보유하고 있는데 신 이사가 기업가치를 훼손하고 주주권익을 침해했다며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그동안 투자기업의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단순 투자자 역할에 머물러 ‘식물주주’ 혹은 ‘거수기’ 소리를 들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2년 2월 하이닉스 대표이사로 선임될 당시 국민연금은 지분율 9.15%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는데도 '중립' 의결권을 행사해 '재벌 봐주기' 논란에 휩싸였다. 의결권행사 전문위원 일부는 이 일로 사퇴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올해 들어 삼성그룹 주식을 크게 늘리면서도 계열사들의 합병 등 대규모 사업구조 재편에 입을 다물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최근 현대차그룹이 한전부지를 인수하면서 지나치게 높은 금액을 배팅해 주식가치를 떨어뜨렸는데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시민단체들은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에 적극 나서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4월 효성그룹의 이사와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 안건에 대해 국민연금에 반대표를 행사할 것을 요청했다.
조석래 회장 등 오너일가가 효성그룹의 분식회계를 통한 조세 포탈과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되면서 기업가치가 훼손된 데 대해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경제개혁연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강화가 기업의 자율을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우려는 국민연금의 투자는 받겠으나 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언제까지 국민연금이 투자기업의 거수기 노릇을 해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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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
◆ 박근혜의 주문, 의결권 행사 강화
국민연금이 기업가치 훼손이나 주주권익 침해를 막기 위한 의결권 행사에 더는 주저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면서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들도 긴장하게 됐다.
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공약인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를 약속했다. 지배주주의 사익 추구 행위를 견제하고 소액주주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미흡한 현실에서 국민연금에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 주주로서 역할을 주문한 것이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해 상반기(12월 및 3월 결산법인) 정기 주주총회에서 유가증권시장법인 334개사 가운데 296개사의 임원 선임 안건 의결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국민연금이 임원선임 안건에 대해 한 건 이상 반대한 기업은 92개사(31.1%)였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 강화와 함께 기업들의 배당 확대 요구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는 현 정부의 기업 배당 활성화 추진 정책에 보조를 맞추려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지난 13일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국민연금의 배당 기준 수립 방안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은 토론회에서 “국내 기업의 배당성향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5%로, 대만이나 브라질의 3분의 1 수준”이라며 “기업들은 적절한 배당정책을 통해 주주이익 환원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적정한 배당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연금은 자본시장연구원에 의뢰해 배당기준에 관한 구체적 연구결과도 내놓았다. 개별 기업의 수익성, 투자기회, 자본구조 같은 주요 배당 요인을 감안해 배당을 적게 하는 기업을 골라낸 뒤 이들을 '중점 감시기업'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또 내년 초까지 기업들의 배당확대를 촉구하는 ‘가이드라인’도 내놓기로 했다.
국민연금의 이런 변화는 다른 연기금뿐 아니라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나 배당확대 요구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독립성과 전문성 갖춰 시장 공감대 얻어야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대주주 견제 강화와 투자손실 최소화를 위해 소극적 주주권인 의결권 행사뿐 아니라 이사·감사후보 추천이나 주주제안 등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영곤 하나대투증권 투자정보팀장은 "국민연금이 주주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면 주요 주주로 있는 상장사는 앞으로 부실계열사 지원 등의 행위를 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며 "기업투명성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 지나친 경영간섭이 될 수 있다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재계 일각에서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시장의 큰 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경영간섭을 하는 것은 사실상 정부가 기업을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에 나서려면 시장의 공감대를 얻어야 하며 이를 위해 내부 조직을 개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의결권과 주주권 행사가 필요하다”며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투명성과 독립성, 전문성을 높이는 제어시스템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