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석 기자 stoneh@businesspost.co.kr2026-04-23 15: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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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정부가 석유 최고가격제를 통해 기름값을 눌러 물가 상승의 급한 불은 껐지만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고민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춘 효과 뒤로 재정 부담과 시장 왜곡, 취약계층 부담이라는 ‘숨은 균열’이 선명해지면서 정책 패러다임 실효성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TF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 테스크포스(TF) 7차 회의’ 모두발언에서 “24일 0시부터 적용될 4차 최고가격은 국제유가 추이, 석유 소비량, 그리고 재정부담, 민생부담 등을 종합 고려해 오늘 회의 논의를 포함한 관계기관 협의를 거쳐 오후 7시에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석유 최고가격제는 국제유가 급등에 대응해 정유사 공급가격 상한을 직접 규제하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정부는 유가 반영 시차와 정유사 손실 보전 등을 고려해 2주 단위로 최고가격을 재설정한다. 지난달 27일 2차 석유 최고가격 지정 이후 휘발유와 경유 가격 상한(정유사 공급가격 기준)을 각각 리터당 1934원, 1923원으로 묶어왔다.
석유 최고가격제는 국내 기름값을 눌러 물가를 잡는 데 일정 부분 효과를 낸 것으로 보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전날 발간한 ‘중동 전쟁 대응 특별자료’를 내고 최고가격제가 3월 소비자물가를 0.4~0.8%포인트 낮추는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했다.
문제는 비용이다. 정부는 이번 추가경정예산(추경)안에 6개월치 최고가격제 지원 예산 4조2천억 원을 편성했다.
국제 유가가 추가 상승할 경우 해당 예산은 조기에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
정유업계에 따르면 1~2차 최고가격이 지정된 한 달(3월13~4월9일) 동안 국내 정유 4사 손실 규모는 1조 원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가 모든 유종에서 2차 최고가격을 리터당 210원씩 올린 뒤 3차 시행부터 동결한 만큼 지난 2주 동안 누적된 손실은 더 커졌을 공산이 크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전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제9차 비상경제본부 회의를 주재하며 “최고가격제와 관련해 물가 폭등 방지, 소비 위축 완화, 유가 민감 계층 충격완화 등 긍정적 효과가 확인됐다”면서도 “석유 최고가격제의 긍정적 효과와 여러 가지 의견들을 충분하게 신중하게 고려해 4차 시행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지속적 재정 투입에 제동을 걸겠다는 ‘엑시트’ 신호로도 읽힌다.
가격 신호 왜곡에 따른 부작용도 감지된다. 최고가격제가 유지되면서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이 형성되면 소비를 자극해 수요가 늘어나고, 이는 다시 재정 부담을 키우는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
▲ 22일 서울의 한 주유소에서 운전자가 주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소비 흐름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일부터 이달 5일까지 휘발유 140만kL(킬로리터), 경유는 183만kL가 판매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판매량인 휘발유 139만kL, 경유 191만kL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3월 두바이유 평균가격이 배럴당 128.5달러까지 치솟았음에도 수요가 위축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가격 상한이 조만간 현실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따른 ‘가장 쌀 때 사두자’는 가수요까지 가세하며 시장의 수급 조절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격 통제 효과가 수요 억제보다 소비 구조 변화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최고가격제의 혜택이 정작 가장 필요한 곳에 닿지 못하고 있는 ‘균열’이다.
KDI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이 낮을수록 에너지 지출 비중이 높아지는 역진적 구조가 뚜렷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농업 종사 가구 및 운수업 단순노무 가구 가운데 고부담 가구 비율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일괄적 가격 통제로는 이들의 ‘생계형 에너지 빈곤’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온 셈이다.
특히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으면서 경제활동 참여 비중은 높아 운송용 연료비 지출이 큰 ‘비수급 저소득층’이 유가 충격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정책 전환의 시급성을 더하고 있다.
정부는 가격을 직접 억누르는 방식에서 피해가 집중된 곳에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타겟팅 지원’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26조 2천억 원 규모의 추경 중 민생 안정 예산 10조5천억 원에 대한 ‘신속 집행’이 그 지렛대다. 해당 사업은 상반기 내 85% 이상을 집행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기획예산처에 따르면 27일부터 1차 고유가 피해지원금 지급이 시작되고 취약 계층 대상 에너지바우처 순차 지급, 5월 대중교통비 소급 환급 등 현금성 지원이 이어진다. 최고가격제가 눌러온 물가 부담의 바통을 추경의 직접 지원금이 넘겨받을 준비를 마친 셈이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