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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옌홍은 어떻게 중국 최대갑부가 됐나

이계원 기자 gwlee@businesspost.co.kr 2014-08-04 18: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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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옌홍은 어떻게 중국 최대갑부가 됐나  
▲ 리옌홍 바이두 회장 겸 CEO

리옌홍은 30대에 이미 중국 5대 갑부에 올랐다. 46세 젊은 나이에 중국부자 1위가 됐다. 올해 재산이 12조 원을 넘는다.

리옌홍은 중국 젊은이들에게 살아있는 우상이다. 돈 때문만은 아니다. ‘단순한 집중’이라는 그의 좌우명에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리옌홍은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베이징대학교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컴퓨터공학 박사학위 과정 입학 통지서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를 과감히 버리고 월스트리트에서 3년 동안 기자생활을 했다.

그러나 선망의 대상이었던 기자의 직위도 곧 버린다. 개발자의 꿈을 안고 미국 실리콘밸리 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마저도 그만두고 창업을 위해 중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탄다.

리옌홍은 ‘나만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신념 이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 경극배우를 꿈꾸던 수재

리옌홍은 중국 샨시의 작은 시골마을의 평범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샨시 지역은 중국의 ‘희곡의 요람’이었다. 경극에 나오는 어린 배우들은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배우는 어린 리옌홍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리옌홍은 샨시 진극단의 신인 발굴 오디션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여러 동작을 맛깔나게 연기했고 그 자리에서 단원으로 뽑혔다. 하지만 부모는 그에게 “공부를 하면 더 넓은 세상을 접할 수 있다”고 학업을 설득했다.

리옌홍은 어린 시절 공부를 싫어했다. 밖에서 동네 아이들과 뛰노는 것을 제일로 여겼다. 그런데 큰누나가 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것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리옌홍은 어떻게 중국 최대갑부가 됐나  
▲ 학사모 쓴 리옌홍 바이두 CEO
중국에서 당시 대학생은 ‘하늘이 내려준 소중한 인재’라는 인식이 강했다. 사방에 널린 누나의 대학입학 축하 현수막을 보고 리옌홍은 ‘수퍼스타’에서 ‘공부의 신’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만큼 리옌홍은 어릴 때부터 주목받기 좋아하고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리옌홍은 공부에만 전념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바닥을 기던 성적을 단숨에 올려놨다. 놀기도 좋아했지만 평소 ‘정보의 집약체’인 책을 읽는 것도 무척 즐겼다. 이는 훗날 막강한 검색 사이트를 개발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

리옌홍은 베이징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전공이었던 정보경영학은 그가 꿈꾸는 ‘개발자’의 길과 너무도 달랐다.

리옌홍은 고민에 빠졌지만 컴퓨터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전공을 공부하면서도 베이징대학교에 개설된 컴퓨터공학 수업을 모조리 다 들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리옌홍은 비전공자에다 중국 유학생인데도 컴퓨터공학 석사를 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 “한 가지 목표를 정하면 끝장을 봐라”

리옌홍은 관심을 두는 곳에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다. 그러나 그밖의 것은 과감히 버렸다.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는 성격은 경영철학의 바탕이 됐다. 그의 경영철학은 “목표를 정했으면 바로 행동하고, 시류에도 흔들리지도 동요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리옌홍은 2008년 베이징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사람이 살면서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며 “한 가지에만 미쳐야 남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리옌홍은 어떤 창업자보다 단순함을 강조했다. 인터넷의 핵심은 ‘단순한 서비스’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하기 때문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널리 알렸다.

리옌홍은 컴퓨터광이었다. 리옌홍은 1994년 처음 인터넷을 접했다. 남들보다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만큼 그는 하루에 평균 8~9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리옌홍은 당시 “하루 이상 컴퓨터 옆을 비운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리옌홍은 “저에게 인터넷은 삶이자 곧 일”이며 “취미이자 소중한 일터”라고 말했다. 인터넷을 통해 눈앞에 간단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경험한 뒤 비즈니스에 인터넷을 접목하는 사업모델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리옌홍은 심지어 월스트리트에서 다우존스 기자로 일하면서도 컴퓨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하이퍼링크’를 접목한 기술을 개발해 회사 사람들에게 발표했다. 그러나 "기사나 쓰라"는 핀잔만 들었다.

리옌홍은 우여곡절 끝에 직접 IT기업을 차려야겠다고 결심했다. 31세의 젊은 나이였다. 모교인 베이징대학교 근처 한 허름한 호텔방에서 바이두를 세웠다.

  리옌홍은 어떻게 중국 최대갑부가 됐나  
▲ 리옌홍 바이두 회장 겸 CEO

◆ “바이두 파산까지 30일밖에 남지 않았다”


바이두는 순풍에 돛단 듯 중국 인터넷시장을 점령했다. 리옌홍은 기술자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글을 굴복시킬 기술개발에 전념했다.

그러나 바이두는 2005년 미국증시에 상장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최대위기에 빠졌다. 바이두가 창립된 지 6년 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뉴스에 바이두가 자산가치 100억 달러가 넘었다는 등 좋은 소식만 들렸다.

리옌홍은 조직내부에서 문제를 발견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조직문화를 표방했지만 곧 나태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직원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 느끼고 연구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바이두가 과대평가됐다는 말들이 나오면서 천정부지로 오르던 주가는 순식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리옌홍은 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단순한 소통을 선택했다. 그는 “바이두가 파산까지 30일 남았다”고 전 직원들에게 공개편지를 보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위기를 뚫고 용감하게 나아가는 혁신과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바이두가 경쟁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리옌홍은 직원들에게 개발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러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고 ‘철밥통’을 끌어안기를 바라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IT기업이 늘 새로운 환경에 노출돼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는 점을 진지하게 설득했다.

이 공개편지는 전 세계 IT업계 인사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 네티즌들의 폭발적 조회를 낳기도 했다. 평소 조용한 리옌홍이 한 번에 과격한 말들을 쏟아내자 대내외적으로 그 효과가 배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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