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한진해운을 포기했다. 한진그룹을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러나 조 회장은 KDB산업은행과 금융위원회 등 당국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힐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한진그룹은 당국과 풀어야 할 현안이 산적한데 한진해운에 대한 조 회장의 선택이 한진그룹 경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 조양호, 미운털 박히나
26일 업계에 따르면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가능성이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다.
산업은행은 이날 한진해운이 제출한 추가자구안을 공개했는데 구조조정 중인 기업의 자구안을 대외에 상세하게 공개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한진해운이 낸 자구안에 대한 마음이 불편함을 보여주는 대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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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
한진해운이 제출한 추가자구안은 기존 자구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 4천억 원에서 1천억 원이 추가됐을 뿐이다.
채권단 내부에서 한진그룹이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 회장의 사재출연도 금액이나 방법이 특정되지 않았다. 다만 ‘그룹 차원의 유동성 확보와 채권단 추가 지원 후 추가 유동성 부족이 발생할 경우’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동안 임종룡 금융위원장과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여러 차례 대주주 책임론을 들어 조 회장의 사재출연을 공개적으로 압박했지만 결국 무시한 셈이 됐다.
특히 이동걸 회장은 조 회장을 여러 차례 직접 만나 그룹 차원의 지원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조 회장이 한진해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진해운 구조조정은 정부 주도의 해운조선업 구조조정의 시금석으로 여겨졌다. 한진해운이 끝내 회생에 실패할 경우 금융당국에 대한 책임론도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자구안 제출기한을 여러 번 연장해주고 우선매수청구권도 준다고 설득했지만 결국 조 회장이 한진그룹을 선택했다”며 “산업은행 입장에서 조 회장이 원망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 한진그룹, 당국과 상대할 현안 산적
조양호 회장은 한진그룹을 살리기 위해 한진해운을 포기했지만 금융당국과 관계는 틀어질대로 틀어지게 됐다.
문제는 한진그룹이 경영권 승계와 검찰고발 위기, 대규모 투자 등 당국과 풀어야 할 과제들을 대거 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과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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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원태 대한항공 총괄부사장. |
한진그룹은 조양호 회장에서 조원태 대한항공 총괄부사장으로 경영권 승계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조 부사장은 1월 대한항공의 전 부문을 총괄하는 총괄부사장 자리에 오른 데 이어 3월과 4월 각각 대한항공과 진에어 대표이사에 올랐다.
한진그룹의 주력인 항공계열사를 모두 총괄하며 사실상 조 회장의 후계자로서 첫해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조 부사장은 검찰에 고발될 위기에 처해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조 부사장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자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 전원회의는 이르면 9월 말 이런 내용이 포함된 심사보고서를 심의한다.
대한항공이 앞으로 추진하는 각종 사업에서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있다.
항공업은 정부와 관계가 매우 중요한 산업 가운데 하나다. 항공사의 밥줄이나 마찬가지인 항공운수배분권을 국토교통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부채비율이 높고 비용이 많이 드는 항공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채권은행과 관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 대에 수천억 원에 이르는 최신 대형기종을 지속적으로 구입해야 하는데 자체 자금만으로 항공기 구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은 대한항공의 주채권은행이다.
대한항공은 2023년까지 8조7천억 원을 투입해 신규 항공기 62대를 들여오기로 했다. 올해에만 2조5천억 원가량이 신규 항공기 도입에 쓰인다.
대한항공은 미국 LA에 짓고 있는 윌셔그랜드호텔에 대해 2017년 말까지 단계적 증자를 통해 약 3800억 원을 지원한다는 계획도 세워뒀다.
◆ 조양호, 왜 한진해운 포기했나
한진그룹의 자구안을 두고 채권단에서 비판이 나오지만 조 회장 입장에서 더 이상 꺼내들 카드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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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15년 5월15일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본사에서 열린 창립 38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특히 그동안 대한항공을 통해 한진해운을 지원하면서 대한항공 주주는 물론 회사 내부에서도 많은 비판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은 2분기 말 기준으로 1000%를 넘는다.
대한항공은 한진해운 지분가치 조정에 따른 평가손실, 영구채권 회수가능가액 하락에 따른 손실 등으로 올해 상반기에 5천억 원에 가까운 영업외손실을 냈다. 한국신용평가는 7월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을 계속 지원하면 재무부담이 커져 신용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 회장이 대한항공을 통해 한진해운을 계속 지원하면 배임혐의로 몰릴 수도 있다.
조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도 부족한 운영자금에 턱없이 모자라는 만큼 사재출연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상선에 출연한 사재는 300억 원이다. 그러나 한진해운에게 내년까지 필요한 운영자금이 최소 1조 원인 만큼 조 회장이 수백억 원을 내놔도 정작 한진해운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보탬은 되지 않는다.
조 회장이 보유하고 사재가 대부분 계열사 지분인 만큼 이를 매각하기도 쉽지 않다. 자칫 경영권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지분 17.76%와 대한항공 지분 2.40%(우선주 기준)을 보유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