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여행을 하면서 몸으로 체득한 진리가 하나 더 있다. 50 넘어서 15일 동안 네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일정은, 아무리 놀러갔다 해도 체력 없이는 힘들었을 거다. <사진 필자 제공> |
[비즈니스포스트] 이번 달엔 따끈따끈한 여행 얘기다. 4월 중순부터 5월 초에 걸쳐, 유럽에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회사를 다닐 때 유럽에 가볼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편집자라면 볼로냐나 런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북페어를 관심 갖고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번 출장길이었고, 꽤나 촉박한 일정이었다. 마음 편한 여행자처럼, 천천히 그 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접해 보기 어려웠다.
처음 계획을 짤 때부터, 이 여행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었다. 2019년(코로나19 이전) 노르웨이로 친구들과 트래킹을 다녀왔지만, 그때만 해도 50대 초반이니 몸과 마음이 쌩쌩했다. 남편도 동반했기에 아무런 걱정할 일이 없었다.
이번 멤버는 가족이 아니라 옛 회사 동료끼리 뭉쳤다. 60을 향해 가는 중년 주부 셋이서, 장장 15일동안 집을 비우기로 ‘도원결의’를 맺었으니!
코로나19가 잠잠해진 이후, 제일 먼저 가까운 일본에 다녀오긴 했다. 매우 혼잡해진 입국 절차 외에는,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한국보다 더 답답할 지경이었다. 팬데믹이라는 대재앙을 겪고 난 뒤, 도대체 유럽이라는 자유로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지 더욱 궁금해졌다.
우리가 가기로 정한 나라는 포르투갈과 독일이었다. 그중 네 도시를 골라 여유 있게 둘러보기로 했다. 바쁘기도 하고 귀찮다는 게으름을 핑계 삼아, 그동안 나는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하지 않는 여행자에 속했다.
현지에서 맞닥뜨리는 우연한 사건이 더 재미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이번엔 한 사람씩 도시를 맡아 가이드를 하기로 약속했으니, 별 수 없이 예습을 해야만 했다.
생전 처음 가보는 리스본을 알기 위해, 신중히 책을 골라 다섯 권쯤 내리 읽었다. 그랬더니 이게 웬 일인가. 가보기도 전에, 마치 살아본 적이 있는 것처럼 시내 곳곳 지리에 환해졌다.
최고의 관광 국가답게, 리스본은 안정감 있고 여유가 넘치는 오래된 도시였다. 미리 짜둔 동선에 따라 우리는 느긋하게 걸어 다니다가, 다리가 아프면 트램에 올라타 ‘일곱 개의 언덕’을 오르내렸다.
▲ 포르투에서는 어디서나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2층으로 된 근사한 아치의 동루이스 다리를 올려다보며, 히베이라 광장에서 마신 맥주 맛은 잊기 어려울 듯하다. <사진 필자 제공> |
'리스본행 야간열차'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처럼, 알칸타라 전망대 벤치에 앉아 시내 전체를 내려다봤다. 기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 대서양의 시작과 끝이라는 ‘호카곶’의 바람을 쐬고 왔다.
외국인들 틈에 섞여 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포르투갈 고유의 노래 ‘파두’ 공연을 보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금문교와 똑같이 생긴 ‘4/15’ 다리를 건너, 브라질 리우의 거대한 조각상을 오마주한 예수상을 만났다.
북쪽에 있는 포르투는 리스본보다 더 자그마한 도시였다. 버스킹을 하는 아마추어 가수들의 천국처럼, 어디서나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2층으로 된 근사한 아치의 동루이스 다리를 올려다보며, 히베이라 광장에서 마신 맥주 맛은 잊기 어려울 듯하다.
오래된 성당마다 하얀 타일 위에 푸른색 물감으로 그린 아줄레루 벽화가 고색창연했다. 5유로나 되는 입장료를 받는데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렐루 서점 앞에는 기다리는 인파의 끝이 보이질 않았다.
리스본이나 포르투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번 여행의 백미는 독일의 ‘뮌헨’이라 하겠다. 오페라 전문가이자 문화 여행가인 박종호씨는 이미 백 차례 넘게 유럽을 방문했단다. 그러고 나서 ‘풍월당 문화 예술 여행’ 시리즈를 책으로 펴내기 시작했다.
우연히도 우리 여행 일정과 딱 들어맞게 1권이 잘츠부르크요, 2권이 리스본, 그리고 3권이 뮌헨이다.(하하! 절대로 미리 컨닝한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존재를 뒤늦게 알고서, 비행기와 기차 안에서 부지런히 '뮌헨'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도시에 관해 설명하는 데도 책 한 권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뮌헨이라는 도시의 풍성한 문화 환경, 그것을 지지하고 향유하는 시민의 높은 수준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격찬해 놓았다.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하는 의구심이 살짝 들었는데, 퀸스틀러하우스 무대에서 열린 실내악 연주를 듣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실감했다.
▲ 나름대로 깔끔하게 멋을 낸 머리 희끗한 사람들이 조용히 객석을 꽉꽉 채워 나갔다. <사진 필자 제공> |
뮌헨 필하모니 소속 현악기 주자들이 선보인 음악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뭣보다 듣는 이들의 매너가 놀라웠다. 관객의 80퍼센트 이상이 시니어들이었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멋을 낸 머리 희끗한 사람들이 조용히 객석을 꽉꽉 채워 나갔다.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보며 깜박 조는 이를 찾아봤지만,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꽤 많은 곡을 바꿔 가며 연주하는 동안, 헷갈릴 만한 막간에 실수로도 손뼉을 치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
그렇다 해도 뮌헨에서 내 관심을 가장 사로잡은 건 역시 펄펄 움직이는 육체들이었다. 특히 눈으로 가늠되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진 ‘영국 정원’에는 기가 막힌 볼거리들이 많았다.
400킬로미터 이상 가야 바다를 볼 수 있는 뮌헨 사람들은 서핑하기가 쉽지 않단다. 이 대신 잇몸이라더니, 정원을 관통하는 이자르 강의 좁고 빠른 유속에서 스릴 있는 서핑을 즐기는 모습은 판타지의 한 장면 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드넓은 풀밭에서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춘들 대다수가 즐기는 스포츠는 무려 배구였다. 그룹마다 여기저기 간이 네트를 쳐놓고, 점프를 하면서 하얀 배구공을 펑펑 날려댔다.
인도와 확실히 구분된 넓은 자전거 길로는 젊은이와 노인 구분 없이 마음껏 자전거 페달을 씽씽 밟았다.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도 놀라웠는데, 이렇게 운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니.
▲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도 놀라웠는데, 이렇게 운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니. <사진 필자 제공> |
아무래도 내 ‘편파적’ 식견으로는, 맥주 마시는 힘이든 문화를 향유하는 멋이든 다 ‘체력’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하긴 이번 여행을 하면서 몸으로 체득한 진리가 하나 더 있다. 나이 50이 넘어서 15일 동안 네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일정은, 아무리 놀러갔다 해도 체력 없이는 힘들었을 거다.
더구나 나 같은 ‘마녀체력’도 14시간 동안이나 폐쇄된 공간에 앉아 있는 장거리 비행이 더 이상 거뜬하지 않았다. 나중이나 언젠가로 미루지 말고, 기회 되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실컷 여행 다니라는 말씀. 마녀체력
작가 이영미는 이제 ‘마녀체력’이란 필명으로 더 유명하다. 27년간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살았다. 한국 출판계에서 처음으로 대편집자란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냈지만, 갈수록 몸은 저질체력이 되어 갔다.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15년간 트라이애슬론으로 꾸준히 체력을 키워 나갔다. 그 경험담을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라는 주제로 묶어 내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출판 에디터에서 작가로 변신했으며 <마녀체력> <마녀엄마> <걷기의 말들>을 썼다. 유튜브 지식강연 '세바시'를 비롯해 온오프라인에서 대중 강연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