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훈 카카오 각자대표이사(사진)는 19일 오전 경기 성남시 판교 카카오 신사옥에서 열린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사고와 관련한 긴급 기자회견 질의응답 시간에 "스스로도 이렇게 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줄 몰랐다"고 말했다. 남궁 대표는 "책임지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모든 항공규정은 피로 쓰여졌다’라는 말이 있다. 비행을 하며 일어난 수많은 사고들과 사례를 공유하면서 더 나은 하늘길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IT산업도 이 길을 갔으면 한다.”
남궁훈 카카오 각자대표이사는 19일 오전 경기 성남시 판교 카카오 신사옥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대표이사 사임을 알리며 이렇게 말했다.
비록 데이터센터 화재 사고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카카오 먹통’ 사태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외부에도 투명하게 공개해 IT업계가 카카오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데 남은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다.
필요하다면 카카오의 치부까지 가감 없이 드러내겠다는 강한 의지도 내보였다.
카카오를 다시 ‘믿을 수 있는 플랫폼’으로 만들기 위한 남궁 대표의 역할이 매우 무거워 보인다.
카카오는 이날
남궁훈·
홍은택 각자대표이사 체제에서
홍은택 단독대표이사 체제로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남궁 전 대표가 올해 3월 카카오의 각자대표에 오른지 7개월만의 일이다. ‘대한민국 셧다운’이라는 대형 사고로 카카오를 향한 비판이 거세지자 책임을 안고 물러나는 모양새다.
남궁 전 대표는 카카오 수장으로 선임되기 직전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으로 재직할 때 사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차기 대표 조사에서 1위 차지했던 인물이다.
그런 평가를 받던 그가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은 그만큼 카카오 10년 역사에 이번 화재사고가 최대 악재라는 것을 대신 말해준다.
이번 사고를 수습하는 것은 카카오 경영진의 몫이다. 이 과정에서 카카오 사업을 총괄해왔던 남궁 전 대표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남궁 전 대표는 카카오 수장 자리에서 내려오는 대신 카카오가 화재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구성한 비상대책위원회의 소위원회인 재난대책소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통상 대형 사고가 터졌을 때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역할을 대신했던 여느 대표이사와 다른 행보다. 한 회사의 수장이라는 상징적 자리에서는 내려오지만 그가 해야 하는 역할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여겨진다.
이번 사고와 관련한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것이 남궁 전 대표의 향후 역할이라고
홍은택 대표는 설명했다.
남궁 대표는 기자회견 이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진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내비쳤다.
그는 “TV를 보면 사고가 생겼을 때 책임자들이 사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사임하는 게 책임지는 것인지 스스로 의문을 많이 가졌었다”며 “그냥 사임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 원인을 파악해 이런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는 제대로 된 사임과 사과라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임한 이후에 책임지고 그만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해서 제 전력을 다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덧붙였다.
이런 배경에서 남궁 전 대표는 앞으로 재난대책소위원장으로서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사고와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추가 예산과 인력을 확보하는 데 우선 방점을 두겠다고 했다.
남궁 전 대표의 말을 보면 앞으로 그의 역할은 단순히 카카오의 화재사고와 관련한 대책 마련에 국한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고가 왜 일어나게 됐는지, 왜 대응이 늦어졌는지, 대응 과정에 문제는 없었는지 등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분석해 IT업계 전반이 공유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로 여겨진다.
그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번 화재사고는) 카카오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IT업계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뿐 아니라 IT업계에 (비극이) 없도록 왜 이런 사고가 났고 어떻게 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을지 세세하게 조사하고 그것을 인프라를 담당하는 시스템 엔지니어가 참고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방향을 잡고 있다”고 했다.
사실상 IT업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백서’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궁극적 역할이라는 뜻이다.
남궁 전 대표의 노력은 신뢰를 잃어버린 플랫폼으로 평판이 추락한 카카오가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으로 피해 원인 규명, 피해 보상 방안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에 머물기보다 카카오가 그동안 외면해온 여러 사업의 본질을 되돌아본 뒤 부족한 지점을 밖으로 공개해 카카오가 자정노력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카카오 입장에서 보면 남궁 전 대표의 빈 자리를 어떻게 메워나가는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날
홍은택 대표는 질의응답 시간에 카카오의 경영진 변화와 관련한 질문에는 “지금으로서는 새 대표이사 선임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며 “제가 단독대표로 경영하게 되고 남궁 대표가 추진했던 여러 사업들은 그대로 유지되고 추진될 것이다”고 말했다.
남궁 전 대표 역시 그가 추진했던 신규 사업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대부분의 신규 사업은 권미진 신사업부문 부문장 수석부사장 산하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권 부사장이 기획했던 것은 계속 진행될 것이고 제가 퇴사를 하는 것은 아니라 조언은 계속 할 수 있다”며 공백이 크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카카오는 이번 판교 데이터센터의 화재사고로 전방위적 비판을 받았다.
경쟁기업인 네이버가 사고 몇 시간 만에 서비스를 복구한 것과 달리 카카오는 나흘 동안이나 서비스를 정상화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뼈아픈 지점이다.
몸집을 수십 배나 불리면서 IT기업의 핵심자산인 데이터센터 투자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해온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비용 절감’이 기업의 핵심 의무까지 외면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대응 과정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익명 기반의 직장인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는 카카오 소속 직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누가 카카오 쓰래? 라인, 토스, 네이버 등 대체재가 많다”며 “애초 오너 마인드가 글러먹은 서비스에 당신들의 일상을 올인한게 문제다. 무료 봉사를 강요하지 마라”라고 글을 올렸다.
전 국민의 소통창구가 일시 중단된 사태의 엄중함과 긴급함을 외면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여론의 비판이 거셌다. 과연 카카오를 신뢰하고 써야하는 플랫폼인지에 대한 의문이 따라나온 것은 당연하다.
카카오를 곤혹스럽게 했던 여러 논란이 재소환됐다는 점도 이번 사고의 여파다.
골목상권 침해, 서비스 차별 의혹, 경영진 스톡옵션 먹튀, 플랫폼 독과점, 자회사 쪼개기 상장 논란 등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다시 집중조명됐다. 정치권은 이번 기회에 카카오를 단단히 질책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