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 ASML에 반도체장비 가격 인상 압박이 커지고 있다. ASML의 EUV(극자외선) 반도체장비. |
[비즈니스포스트] 네덜란드 반도체장비 전문기업 ASML이 급격한 원가 상승과 미국 정부의 정치적 압력에 영향을 받아 고객사에 공급하는 장비 가격을 크게 높일 가능성이 떠오른다.
삼성전자가 3나노 등 최신 반도체 파운드리 미세공정 투자에 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핵심 협력사인 ASML의 장비 가격 상승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블룸버그는 현지시각으로 20일 “ASML이 반도체 공급 과잉보다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며 “실적 부진에 이유를 대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ASML은 이날 콘퍼런스콜을 통해 실적 및 사업 전망을 발표했다. 2분기 매출은 54억 유로(약 7조2천억 원)로 증권가 예상치를 소폭 웃돌았지만 3분기 및 연간 매출 전망치는 크게 낮아졌다.
블룸버그는 “ASML이 공급망 및 장비 생산 관리 측면에서 약점을 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며 반도체장비 생산 차질이 실적에 악재로 반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ASML은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된 뒤 장비 생산에 쓰이는 반도체 등 부품과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생산 지연 문제를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미 장기화되면서 매출과 수익성에 모두 악영향을 미치고 있어 ASML이 반도체장비 가격 인상을 통해 실적 부진을 만회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중단으로 유럽의 물가 상승률이 전 세계 주요 지역 가운데 가장 심각한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반도체장비 가격을 높일 수밖에 없는 이유로 꼽힌다.
인력 부족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기 위해 임금을 인상해야 한다는 점도 ASML에 수익성 부담을 키우고 있다.
ASML은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에 미세공정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EUV(극자외선)장비를 공급하는 유일한 업체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EUV장비 가격은 1대에 2천억 원 수준, 앞으로 출시되는 신형 장비 가격은 4천억 원에 육박하지만 앞으로 수 년 뒤의 고객사 주문을 미리 받아야 할 정도로 공급 부족을 나타내고 있다.
ASML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활용해 EUV장비 가격을 높이기 매우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셈이다.
물가 상승 및 임금 등 비용 인상 이외에 미국 정부의 ASML을 향한 압박도 앞으로 반도체 장비 가격을 높이는 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최근 ASML이 중국 고객사에 반도체장비를 공급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 도입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 ASML 장비에 미국 기술이 일부 활용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한 것이다.
ASML은 이미 중국 고객사에 EUV장비를 공급하지 못하고 있는데 구형 반도체 생산에 쓰이는 DUV장비 공급마저 끊긴다면 실적에 매우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피터 베닝크 ASML CEO는 콘퍼런스콜에서 “중국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의 중국 반도체장비 수입 규제 가능성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은 셈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중국 반도체산업을 견제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두고 있는 만큼 ASML의 장비 수출 규제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시각도 나온다.
ASML이 이에 따른 실적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다른 국가 고객사에 공급하는 장비 가격을 인상하는 전략을 쓸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ASML이 앞으로 고객사에 공급하는 반도체장비 가격을 인상할 요인이 늘어나고 있는 점은 대규모 생산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삼성전자에 금전적 부담을 키울 수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세계 최초로 생산을 시작한 3나노 미세공정 반도체 양산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EUV장비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생산라인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신설되는 170억 달러 규모의 새 삼성전자 파운드리공장도 EUV장비 기반의 최신 미세공정 기술이 중점적으로 도입된다.
이런 상황에서 ASML의 반도체장비 가격 인상에 속도가 붙는다면 삼성전자의 투자 비용이 자연히 크게 늘어나 앞으로 파운드리사업 실적 및 투자 계획에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베닝크 CEO는 반도체장비 원가 상승 문제를 언급하며 “고객사 및 협력사들과 바람직한 방향을 찾기 위해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삼성전자 등 주요 고객사와 가격 인상을 위한 논의를 벌이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수요 둔화에 따른 파운드리 업황 악화에 더해 시설 투자 부담까지 커지면서 삼성전자가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 데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