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자진사퇴 기자회견을 했다.<뉴시스> |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결국 자진사퇴했다. 문 후보자를 지명한 박근혜 대통령은 임명동의안 재가를 일주일 동안 미루었다. 문 후보자는 사퇴할 의사가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번 사태를 놓고 박 대통령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 많다. 대통령으로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지명철회를 하든지 임명동의안을 재가해 인사청문회에서 결론을 내도록 하든지 명확히 해야 하는데 차일피일 시간만 끌었다는 것이다. 인사권자로서 무책임한 처사라는 지적인 셈이다.
◆ “저를 거두어드릴 수 있는 분도 그분입니다”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분도 그 분이시고 저를 거두어드릴 수 있는 분도 그 분이십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제가 사퇴하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님을 도와드리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24일 지명 14일 만에 사퇴했다. 그는 이날 서울정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가 총리후보로 지명 받은 후 이 나라는 더욱 극심한 대립과 분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며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께서 앞으로 국정운영을 하시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고 사퇴배경을 설명했다.
문 후보자는 국회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청문회를 열지 않은 국회를 두고 “신성한 법적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며 “국회가 스스로 만든 법을 깨면 이 나라는 누가 법을 지키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또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하며 친일논란을 불러온 발언에 대해 해명했다. 그는 “언론의 생명은 진실보도인데 몇 구절을 따내서 그것만 보도하면 그것은 문자적 사실보도일 뿐”이라며 “그것이 전체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면 그것은 진실보도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친일논란을 의식한 것인지 문 후보자는 조부가 독립투사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검증팀이 보훈처에 알아보니 제 할아버님이 항일투쟁 중에 순국하신 것이 밝혀졌다”며 “검색창에 문남규, 삭주 이렇게 한 번 쳐보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문 후보자는 13분 동안 사퇴문을 읽은 뒤 별도의 질의응답 없이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문 후보자는 지난 10일 박 대통령에 의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뒤 과거 친일발언이 알려져 국민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교회강연에서 “일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언론사 칼럼과 대학 강의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사과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야당은 물론 서청원 의원 등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은 문 후보에게 자진사퇴를 요구했고, 문 후보자는 일주일간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 버티다 결국 사퇴했다.
유기홍 새정치민주연합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국민들의 청문회는 이미 끝나 있었다”며 “결단을 늦게 해서 국민과 대통령을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이날 트위터에 “문 지명자는 언론인으로 반민족적 반역사적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며 만시지탄이지만 그의 사퇴를 평가한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은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박대출 새누리당 대변인은 현안브리핑을 통해 “국무총리 후보자의 연속 낙마는 그 자체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며 “문창극 후보자의 사퇴는 국민 여론을 되돌릴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 데 따른 불가항력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 누가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했는가?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문 후보자의 자진사퇴에 대해 청문회를 거칠 수 있는 기본권을 누리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법과 원칙에 따라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성숙한 민주주의”라고 말하며 청문회까지 가야했다는 뜻을 밝혔다.
|
|
|
▲ 박근혜 대통령은 6.25전쟁 국군 및 UN군 참전유공자 위로연에 참석했다. |
그는 “인사청문 절차를 통해 해명을 한 뒤에 본회의에서 부결되면 총리가 못 되는 것”이라며 “법적으로 주어진 기본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낙마하는 것은 우리가 과연 선진 정치시스템 갖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가 들게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 후보자가 청문회에 가지 못했던 것은 다름 아닌 박근혜 대통령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문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재가를 차일피일 미뤘다. 애초 중앙아시아 순방에 오르기 전 16일 재가하려던 임명동의안을 귀국 후로 미루더니, 21일 귀국한 후에도 아무런 언급없이 나흘이 흘렀다.
박 대통령은 임명동의안을 재가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지명 6일 만에 갑작스럽게 자진사퇴해 박 대통령이 미처 숙고할 시간도 없었던 안대희 총리 후보자의 경우와 다르다.
박 대통령 스스로 마음이 변해 문 후보자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면 지명철회를 해야 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임명동의안을 재가해 국회에서 청문회를 열도록 하든지 아니면 지명을 철회하든지 어느 쪽을 결정하는 게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계속 강조해온 원칙이고 절차”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임명동의안을 재가하지도 지명철회를 하지도 않고 시간만 보내며 국정 공백상황을 방치했다.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국정공백이 장기화되고 있다”며 “참으로 무책임한 대통령의 자세”라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비판은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나왔다. 김영우 새누리당 의원은 “총리를 지명해 놓고 지금까지도 청와대는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다”며 “무책임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문 후보자는 사퇴 기자회견에서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이도 그 분이시고 저를 거두어드릴 수 있는 분도 그 분이십니다”라고 말했는데 이 또한 박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을 표시한 발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문 후보자가 총리로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을 떠나 이번 사태를 보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끌면서 우회적으로 문 후보자에게 자진사퇴를 강요해 결국 문 후보자를 두 번 죽이는 결과를 만들어 씁쓸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