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현대중공업지주 대표이사 겸 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에 내정된 정기선 사장으로서는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사용하려던 대규모 자금을 친환경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14일 조선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의 기업결합이 어려워지면서 국내 조선산업의 중장기 경쟁력 강화에 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조선업은 세계적 조선사인 한국조선해양,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3사 중심 체제로 이들 사이에 출혈 경쟁도 빈번했다.
고정비가 많이 드는 조선업 특성상 꾸준한 일감확보는 조선소 유지에 필수 조건이다. 발주 시장이 한정된 상태에서 치열한 수주 경쟁이 이뤄진 것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조선업 불황이 일감 확보를 위한 저가 수주로 이어지기도 했다. 선박 건조가격은 조선사 수익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최근 조선사들이 수익성 측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
‘빅2’ 체제 구축은 국내 조선사 사이 경쟁을 줄이고 각자 추진하고 있는 미래 기술을 향한 투자 효율성을 높일 방안으로 여겨졌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중장기적으로 국내 조선업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이런 흐름이 이어져왔다. 중국에서는 2019년 1위 조선그룹인 ‘남선(남쪽 조선그룹)’ 중국선박공업(CSSC)과 2위 조선그룹인 ‘북선’ 중국선박중공(CSIC)가 합병했다. 일본에서는 2020년 1위 조선사인 이마바리조선과 2위 재팬마린유나이티드(JMU)이 합작조선사를 출범했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도 2019년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 민영화 본계약을 맺는 자리에서 “조선산업 재편을 통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지금의 적기를 놓치면 우리 조선업도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정기선 사장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2’에서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의 기업결합은 단순히 기업 사이 합병이 아니라 조선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다”고 기업결합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다만 국내 조선업 경쟁력 강화를 향한 이런 우려와 별개로 이번 기업결합이 최종 무산되면 한국조선해양에는 오히려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위해 마련해 둔 대규모 자금을 미래 준비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조선해양은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한 뒤 대우조선해양의 대규모 유상증자에 참여하기로 했다. 유상증자 참여 규모는 1조5천억 원에 이른다. 한국조선해양은 지난해 3분기 말 별도기준 현금및현금성자산 1조2686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해 10월 사장으로 승진한 ‘정기선 시대’를 본격적으로 앞두고 있는데 미래 사업에서 거둘 결실이 정 사장 체제를 굳건히 할 수 있는 열쇠인 만큼 투자 여력이 늘어난 것은 신사업을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
정 사장은 ‘CES 2022’를 통해 사장 승진 뒤 현대중공업그룹 대표 자격으로 첫 공식 행사에 나서며 경영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정 사장이 대표로 이끌 한국조선해양은 조선 중간지주사로서 현대중공업그룹 미래 사업 추진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조선해양은 액화천연가스(LNG),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원의 운송 및 추진 선박, 자율운항 선박, 스마트조선소 구축 등 현대중공업그룹 조선 계열사들의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다.
또 한국조선해양은 글로벌 1위 조선사로 현재 자체적으로 충분한 경쟁력과 규모의 경제를 갖췄다고 평가된다.
김용민 케이프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조선해양에 유럽연합의 기업결합 승인 불발은 악재로 볼 수 없다”며 “오히려 기업결합이 무산되면 유상증자 리스크 해소 및 향후 신사업 진출에 필요한 자금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조선해양은 이날 공정거래위원회에 이번 기업결합 심사 철회서를 제출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기업결합 불허 결정에 따른 조치로 공정위는 기업결합 심사를 종료했다.
다만 한국조선해양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결정에는 지속해서 대응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현재 유지하고 있다.
한국조선해양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불허 결정이 난 뒤 입장문을 내고 “유럽연합이 오래전에 조건 없는 승인을 내린 싱가포르와 중국의 결정에 반하는 불허 결정을 내린 것에 매우 유감”이라며 “유럽연합의 최종 결정문을 면밀히 검토한 뒤 유럽연합 법원을 통한 시정요구 등 가능한 대응 방안을 종합적으로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장상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