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은 삼성전자와 TSMC가 주도하는 파운드리 공정의 미세화 경쟁에서 뒤쳐져 있다. 팻 겔싱어 인텔 CEO가 파운드리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공정 미세화가 아닌 유럽 차량용 반도체시장을 바라보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팻 겔싱어 인텔 CEO.
27일 외신들에 따르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조만간 유럽의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기 위한 현지 투자유치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티에리 브레통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내부시장담당위원은 네덜란드의 반도체장비회사 ASML을 최근 방문한 뒤 현지매체 뉴스라이브와 인터뷰에서 “유럽에서 반도체 생산량을 확대하고 반도체 공급망을 지원하기 위해 중대한 자금을 투입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글로벌 반도체 생산량의 20%를 확보한다는 ‘2030 디지털캠퍼스’ 로드맵을 실현하기 위해 1345억 유로(183조 원가량)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업계에선 인텔을 유력한 유럽지역 투자기업으로 꼽는 시선이 나온다.
앞서 겔싱어 CEO가 4월 말~5월 초 유럽 출장에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들과 파운드리공장 설립을 논의했기 때문이다.
로이터는 겔싱어 CEO가 브레통 위원과 200억 유로(27조 원가량) 규모의 파운드리 투자를 위한 ‘심층적 논의(in-depth discussion)’를 진행했다고 전했다. 공장 건설 후보지로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독일이 꼽혔다.
눈길을 끄는 것은 겔싱어 CEO가 투자 보조금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겔싱어 CEO는 유럽 정책매체 폴리티코유럽과 인터뷰에서 “인텔이 유럽연합에 요구하는 것은 아시아 반도체회사와 비교할 때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것이다”며 “80억 유로(11조 원가량) 수준의 보조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체 예상 투자규모의 40%에 이르는 막대한 지원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겔싱어 CEO가 유럽 파운드리공장에 차량용 반도체 생산라인을 포함할 수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차량용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한 8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다.
반면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등 글로벌 상위 파운드리회사들은 소품종 대량생산에 적합한 12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TSMC 두 회사가 글로벌 파운드리시장의 기술 경쟁을 주도하면서 반도체장비회사들도 12인치 장비의 생산에 주력하고 있다. 네덜란드 ASML이나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등 글로벌 주요 반도체장비회사들은 2018년 이후로 8인치 장비를 만들지 않는다.
반도체장비회사 한 관계자는 “8인치 장비는 이제 장비 생산공정이 아닌 수작업에 가까운 방식으로 만들어져 가격이 매우 비싸다”며 “중고품의 가격도 올해 들어서만 30% 이상 상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겔싱어 CEO가 대규모 보조금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은 차량용 반도체 생산라인 구축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시선이 많다. 차량용 반도체에 필요한 장비가 비싸 보조금을 통해 투자비의 일정 부분을 충당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겔싱어 CEO는 유럽 출장에서 독일 완성차회사 BMW의 고위 관계자와도 만나 차량용 반도체와 관련한 현안을 논의했다. 로이터는 소식통을 인용해 그가 폴크스바겐 본사에 방문했을 수 있다고도 전했다.
4월12일 열린 미국 백악관의 반도체회의 이후 겔싱어 CEO는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차량용 반도체가 글로벌 차원에서 부족현상을 겪고 있는 만큼 인텔이 직접 생산에 나서겠다”며 “앞으로 6~9개월 안에 실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도록 차량용 반도체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회사)와 협의를 진행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텔이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아 차량용 반도체 생산라인을 구축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동맹의 일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지 반도체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한 외국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와 TSMC는 최근 미국의 파운드리 투자에 각각 집중하고 있다. 두 회사가 모두 100조 원 이상의 투자계획을 내놓은 것과 달리 인텔은 미국에서 20조 규모의 애리조나 파운드리공장 건설계획만을 내놨다.
인텔로서는 유럽에 투자할 자금여유는 비교적 넉넉한 셈이다.
다만 인텔은 최근 7나노미터 공정이 적용된 칩의 설계를 마쳤으나 파운드리 공정 기술력이 10나노 수준에 머물러 있어 이를 당장 생산할 능력은 없다. 인텔은 이 칩의 양산을 시작하는 시점을 2023년 하반기로 잡고 있다.
2023년이면 삼성전자와 TSMC는 파운드리 공정에 3나노 기술을 도입했을 시점이다. 미국 내에서는 경쟁업체와 기술 경쟁을 펼치기 힘든 만큼 유럽으로 눈을 돌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인텔이 삼성전자와 TSMC와 공정 미세화로 직접 경쟁하기가 무리인 만큼 차량용 반도체에서 파운드리 경쟁력을 키우는 길을 찾으려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