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 출신 펫 갤싱어 CEO가 글로벌 반도체기업 인텔의 키를 잡는다.
인텔은 ‘반도체 공룡’이라 불릴 정도로 존재감이 크지만 최근 첨단 반도체 생산기술에서 뒤처져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기업과 협업을 모색하고 있다.
다만 갤싱어체제에서 인텔과 삼성전자의 협업이 장기간 지속할지는 불투명하다. 갤싱어 CEO가 반도체 자체생산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관계도 인텔의 ‘반도체 자립’ 의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15일 인텔 CEO에 펫 갤싱어 전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올랐다.
갤싱어 CEO는 보도자료를 통해 "인텔은 기술의 모든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며 "기술자로서 이 위대한 회사를 발전시키는 데 리더 역할을 하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갤싱어 CEO는 재무전문가였던 밥 스완 전 CEO와 달리 기술적 전문성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앞서 인텔에서 30여 년 일하면서 USB와 무선인터넷(와이파이) 등 핵심 IT기술 개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행동주의 펀드 서드포인트는 인텔의 새 CEO 선임을 긍정적으로 봤다.
미국 블룸버그에 따르면 서드포인트는 최근 투자자서한에서 “갤싱어 CEO가 세계 최고의 프로세서 공급자로서 인텔의 지위를 성공적으로 되찾으면 추가적 주주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며 인텔의 장기주주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는 인텔이 파운드리를 확대해 미세공정 부진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풀이된다.
인텔은 반도체 설계와 생산을 함께 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 중앙처리장치(CPU)분야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해 왔다.
다만 요사이에는 인텔의 반도체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인텔이 10나노급 이하 미세공정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AMD 등 경쟁기업은 대만 TSMC 같은 파운드리기업과 협력해 7나노급 이하 반도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서드포인트는 이처럼 인텔이 기술적으로 뒤처진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지난해 인텔에 주주서한을 보내 반도체 직접생산 중단 등 대안을 찾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갤싱어 CEO가 인텔의 파운드리 비중을 얼마나 확대할지에 반도체업계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앞서 인텔은 파운드리 확대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CEO 취임 이후 파운드리 전략을 발표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아직 구체적 계획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시장에서는 인텔과 삼성전자, 인텔과 TSMC의 협력이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오스틴법인을 통해 인텔의 반도체 일감 일부를 받았고 TSMC는 인텔로부터 CPU 생산을 수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갤싱어 CEO는 장기적으로는 대부분의 반도체를 자체생산하던 이전 체제로 복귀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텔 CEO로 내정된 뒤 2020년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2023년 대부분의 제품을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며 인텔이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기업에 모든 반도체 생산을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갤싱어 CEO가 취임 이전부터 반도체 자체 생산을 확고히 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인텔은 이미 상당한 규모의 반도체 생산능력을 갖춘 만큼 단기적 생산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만으로 파운드리 의존도를 높이기는 어렵다.
시장 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인텔은 지난해 웨이퍼 기준 반도체 생산량에서 세계 10위 안에 들었다. 또 인텔이 운영하는 반도체공장은 모두 15곳에 이른다.
파운드리만으로는 인텔의 막대한 반도체 수요를 충족하기 쉽지 않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현재 세계 최대 파운드리기업으로 꼽히는 TSMC조차 수많은 기업의 반도체 일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반도체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파악된다. 대표적으로 AMD, 엔비디아 등 TSMC 고객사들이 최근 반도체 공급부족 문제를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겔싱어 CEO는 반도체산업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 미국은 중국과 치열한 반도체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2025년까지 대부분의 반도체를 스스로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기술의 중국 유출을 저지하는 데 나섰다.
미국은 아시아에 훨씬 못 미치는 반도체 생산능력을 확대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세계 반도체 생산능력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2.5%에 불과했지만 한국·대만·중국 등 아시아 지역은 80%가량의 생산능력을 점유했다.
미국 반도체산업을 대표하는 인텔이 이런 상황에서 자체생산을 대폭 줄이고 파운드리에 기대겠다는 방침을 내놓기에는 정부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스완 전 CEO는 인텔의 미세공정문제가 부각됐던 지난해에도 미국 국방부에 서신을 보내 미국 내 반도체공장 건설에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갤싱어 CEO 역시 반도체 자체생산을 위한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합을 맞춰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는 1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반도체 생산 및 연구개발을 위한 격려금(인센티브)·세금공제 등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인텔, AMD, 엔비디아, 퀄컴, IBM 등 미국 반도체기업 20곳의 CEO들이 서한에 이름을 올렸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