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들이 경영 전면에 나설 때 각자대표제는 유용하게 활용된다.
특히 경영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오너 후계자들의 경우 단독대표에 올라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은 부담이 된다.
최근 오너 후계자들이 각자대표의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 녹십자 등 오너 후계자 각자대표 올라
KCI는 12월1일 윤재구 회장 단독대표체제에서 윤 회장과 윤광호 전무의 각자대표체제로 변경했다.
윤 전무는 윤 회장의 차남이다. 부자가 각자대표를 맡아 자연스럽게 경영승계가 이뤄질 것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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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은철 녹십자 사장. |
한국주강도 10월 오너 3세를 각자대표로 선임했다. 한국주강은 하종식 사장과 하만규 이사를 각자대표로 세웠다.
하만규 이사는 1989년생으로 20대의 젊은 나이지만 큰아버지인 하종식 사장과 함께 회사를 이끌게 됐다.
하 이사는 하경식 전 한국주강 사장의 장남이다. 당분간 각자대표체제를 이어가다가 하 이사가 한국주강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크다.
녹십자는 지난해 12월1일 허은철 녹십자 사장을 기존 대표이사였던 조순태 사장과 함께 각자대표에 선임했다. 허 부사장은 허영섭 전 녹십자 회장의 아들이어서 그가 대표이사를 맡은 것은 경영권 승계 절차가 시작됐음을 뜻한다.
국내 최대기업인 삼성그룹에서도 오너 3세가 각자대표가 될 가능성이 떠오른다.
이번 연말인사에서 이서현 사장이 삼성물산에서 패션부문장을 맡았다. 삼성물산은 사업부별 각자대표제를 하고 있는데 윤주화 전 삼성물산 패션부문장을 대신해 이 사장이 대표이사에 오를 가능성이 거론된다.
◆ 오너들은 왜 각자대표로 이름을 올릴까
경영승계 과도기를 맞는 기업들에서 각자대표 체제는 자주 도입된다. 오너 후계자가 각자대표를 맡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진그룹의 경우 오너 3세가 모두 계열사에서 각자대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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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원태 한진칼 대표이사(왼쪽)와 조현민 정석기업 대표이사. |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은 한진칼에서 각자대표에 올라 있고, 차녀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는 정석기업에서 각자대표를 맡고 있다.
조양호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도 '땅콩회항사건'으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한진관광 각자대표를 맡았다.
두산그룹의 오너 4세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은 2007년 두산중공업 각자대표에 올랐다. 그 뒤 이남두 부회장, 정지택 부회장, 한기선 사장 등으로 전문경영인 파트너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박 부회장은 대표이사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각자대표제는 대표 각자가 독자적 책임과 권한을 지닌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자대표제는 후계자가 기존 경영인으로부터 경영 노하우를 습득하고 경영에 참여하는 경험을 쌓는 경영수업의 최종단계로 도입되는 경우다.
이런 각자대표체제에서 실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오너 후계자 혼자 떠안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기존경영인의 뒷받침 속에 실적개선을 이룰 경우 경영능력을 입증하기에도 편리하다. 각자대표제를 선택하는 오너 후계자가 많은 이유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오너가 각자대표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가장 크다”며 “오너-전문경영인으로 구성된 각자대표제의 경우 권한은 오너에게, 책임은 전문경영인에게 쏠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 각자대표제, 책임과 권한 사이 줄타기
책임을 덜 수 있다는 점만 보면 각자대표제보다 공동대표제가 유리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공동대표제의 경우 대표 개인의 권한도 그만큼 축소되기 때문에 오너 경영체제에서 선호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공동대표제보다 모든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각자대표제를 선택한다.
오너가 전문경영인을 견제하지 못해 각자대표제가 실패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각자대표제에서 모든 대표이사가 동일한 권한을 누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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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선 현대시멘트 회장. |
현대시멘트는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소송을 벌이고 있는데 각자대표제가 실패한 대표적 사례다. 현대시멘트는 올해 10월 정몽선 회장과 이주환 사장의 각자대표체제에서 이 사장 단독대표체제로 변경됐다.
정 회장이 이전에 함께 각자대표를 지냈던 김호일 전 부회장 등 전현직 경영진을 배임혐의로 고소하자 이사회가 정 회장을 해임한 것이다.
정 회장은 현대시멘트 경영악화가 김 전 부회장 등의 경영부실 때문이라며 소송을 통해 책임을 묻고 있다. 정 회장은 김 전 부회장 등이 무단으로 부실계열사를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각자대표 사이에 분쟁이 벌어져 기업이 매각된 사례도 있다.
유경선 유진기업 회장은 2007년 하이마트를 인수해 전문경영인인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과 나란히 각자대표에 올랐다. 하지만 하이마트 최대주주 유 회장과 2대주주 선 전 회장은 경영권을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결국 하이마트를 롯데그룹에 넘겼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