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면 반지하에 사는 남매가 윗집의 와이파이를 주인 몰래 쓰는 상황이 나온다. 이들은 윗집 주인이 건 암호 때문에 와이파이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자 화장실의 변기 앞에서 집 근처 카페의 와이파이에 접속해 ‘데이터 기생’을 이어간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와이파이 난민’, ‘데이터 거지’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 서울시는 무료로 제공하는 공공와이파이로 이동통신회사의 기본요금제를 이용하는 서울시민 612만 명이 1인당 월 5만2천 원, 1년에 3조8776억 원의 사용편익을 누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 |
스마트폰이 삶을 위한 필수품이 된 상황에서 저소득층의 통신비 부담이 고소득층과 비교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조사에 따르면 가계소득 하위층은 통신비 보조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소득층에 비해 통신비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과거에는 식료품비 비중을 따지는 엥겔지수로 가계소득 수준을 판단했다면 이제는 통신비의 비중으로 가계소득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이제 이동통신은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필수재로 인식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가계의 통신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2017년 7월 요금감면제도의 확대와 요금할인율 상향, 공공와이파이 확대 등을 발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7일 2022년까지 1027억 원을 들여 공원과 유원지, 사적지, 공공주차장 등 공적 공간에 공공 와이파이를 무료로 제공하는 계획을 내놨다.
무제한 이동통신 요금제를 쓰는 가입자와 일반 이동통신 요금제를 사용하는 가입자 사이의 데이터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다.
박 시장은 공공 와이파이 공급을 통해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데이터 격차를 줄이고 저소득층의 정보 접근성을 높여 '통신 기본권'을 보장한다고 강조한다.
데이터격차에 따른 통신격차가 정보격차로 이어지고 결국 빈부격차를 더 악화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 시장이 내놓은 공공 와이파이를 공급계획은 취약계층의 데이터 소외를 막고 서울시민의 정보격차를 줄인다는 측면에서 취지가 좋다.
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아쉬움이 든다.
먼저 무료 와이파이 공급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과연 이룰 수 있을지 여부다.
서울시는 사업계획 설명회에서 통신기본권 보장과 서울시민의 사용편익 증가를 사업목표로 내세웠다.
서울시는 무료로 제공하는 공공 와이파이로 이동통신회사의 기본요금제를 이용하는 서울시민 612만 명이 1인당 월 5만2천 원, 1년에 3조8776억 원의 사용편익을 누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울시가 제공하는 공공 와이파이는 공급 지역이 공원이나 공공기관 등으로 제한돼 집이나 다른 장소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이동 중에 공공와이파이를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서울시민이 하루의 대부분을 공공장소에서 보낸다면 공공 와이파이 공급정책은 탁월한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 그렇지만 좋은 취지와 명분을 앞세워 실효성은 대충 덮고 정책효과만을 홍보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두 번째 와이파이 품질이다.
그동안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와이파이는 자주 끊겨 이용하기에 품질이 좋지 않았다. 공공 와이파이보다 나은 품질인 서울 지하철의 와이파이도 160명 정원인 열차에 승객이 많아지면 와이파이가 끊겨 통신사 무선데이터로 옮겨 탈 수 밖에 없다.
공공부문의 정책은 취지도 중요하지만 목표로 잡은 효과를 실현해 내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무료 공공 와이파이로 저소득층의 통신복지를 높이겠다는 좋은 사업취지를 실현하는 최적의 방법이 과연 공공 와이파이 확대였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데이터 이용 파우치를 제공하거나 소득수준별 보조정책을 조금씩 확대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사업을 진행하기에 좀 더 적합하거나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작업은 아무리 검토하고 고민해도 부족하지 않다.
박 시장이 통신품질에 빠르게 반응하는 소비자의 생리나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가는 통신사업에 충분한 검토없이 다음 정치적 행보를 위해 서둘러 정책을 꾸려 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소비자들은 변덕이 심하다. 취지가 좋은 일에 공감하던 소비자들도 불편을 자꾸 주면 냉혹하게 등을 돌린다.
영화 기생충 남매처럼 와이파이 난민의 삶을 사는 계층을 돕겠다는 좋은 취지에 박수를 보내는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한 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릴 수 있다. 박 시장이 대선을 향해 가고자 한다면 마음에 새겨야 한다. [비즈니스포스트 고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