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괄구제는 윤 원장이 하반기에 금융 소비자 보호를 위해 도입하기로 한 제도로 현재 시범운영 되고 있는데 생명보험사의 즉시연금 미지급금과 관련된 사안에 처음 적용됐다.
일괄 구제란 금융회사가 비슷한 금융피해를 본 모든 소비자에게 일괄적으로 피해액을 지급하도록 하는 제도다.
분쟁조정 기능과 일괄 구제를 엮어 금융 소비자 보호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윤 원장의 포석이었다.
소비자들이 법정 소송을 거치면 돈과 시간이 많이 소모되고 대형 로펌을 앞세우는 금융회사를 이기기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금감원의 분쟁 조정과 일괄 구제는 소비자들이 큰 비용 부담 없이 민원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다.
금융회사와 민원 당사자가 분쟁조정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면 조정이 성립돼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이 발생한다.
윤 원장은 7월 말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사후 구제의 내실화를 위해 다수 소비자의 동일 유형 피해에 일괄 구제제도를 도입하는 등 민원·분쟁 인프라 확충을 추진해 나가겠다”며 “사후 구제 절차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 분쟁 조정 결정에 ‘편면적 구속력’을 부여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편면적 구속력’이란 분쟁 조정 결정에 소비자만 소송을 걸 수 있고 금융회사는 이의 제기를 할 수 없도록 해 분쟁 조정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그러나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이 금감원의 즉시연금 미지급금 일괄 구제 권고에 반발해 잇달아 ‘강공’을 펼치면서 윤 원장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삼성생명은 분쟁 조정안을 일단 하나의 사례로 받아들였지만 금감원의 일괄 구제 권고를 거부한 뒤 다른 민원인을 상대로 채무부존재 소송을 제기했다.
한화생명은 분쟁 조정안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금감원의 일괄 구제 권고도 거부했다. 금융회사가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안을 거부한 것은 이례적이다.
두 회사 모두 법적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태도를 보이며 즉시연금 미지급금을 둘러싼 금감원과 생명보험사들의 힘겨루기는 일단 법원으로 넘어가는 수순을 밟고 있다.
윤 원장이 일괄 구제제도를 뒷받침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거나 분쟁 조정을 전담할 기구를 설치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완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일찍 칼을 빼들면서 금융회사들이 반발할 여지를 내줬다는 말도 나온다.
분쟁 조정과 일괄 구제를 통한 금융소비자 보호 방식이 법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금융회사에 막중한 부담을 지우는 만큼 엄격한 법적 근거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해외에도 금융권에 일괄 구제제도가 도입된 곳은 없다. 주로 집단소송을 통해 법적 절차를 밟는 방식으로 소비자 보호제도가 꾸려져있다.
오히려 일괄 구제의 도입으로 분쟁 조정제도 마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점도 골칫거리다.
금융회사들이 하나의 분쟁 조정안을 받아들이면 일괄 구제제도에 따라 유사한 사례의 모든 부담을 져야하는 만큼 이번 삼성생명 및 한화생명처럼 분쟁 조정안을 일단 거부하고 법적 소송을 준비할 가능성이 크다.
윤 원장은 16일 금감원에서 열리는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즉시연금과 관련해 공식발언을 내놓을 것으로 점쳐진다.
금감원의 권고에 따르지 않더라도 "보복성 조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분쟁 조정과 일괄 구제를 통한 금융 소비자 보호 방안이 초기부터 힘을 잃을 수도 있는 만큼 종합검사 등 강공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윤 원장은 금융 소비자 보호가 법적 분쟁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며 “생명보험사들이 배수진을 치고 있지만 윤 원장도 물러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최석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