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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전주가 낳은 스타 정치인으로 대선 후보까지, '경력직' 통일부 장관 [2025년]
조성근 기자 josg@businesspost.co.kr 2025-12-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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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통일부 장관.

정동영은 통일부의 장관이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적인 남북 관계 구축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아울러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통일부 정상화, 끊어진 북한과의 연락 채널 복구에도 힘을 쏟고 있다.

1953년 7월27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영국 웨일스대학교 카디프대학원에서 언론정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문화방송(MBC)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의원을 지냈고 참여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뒤 고향에서 물러나 있다가 국민의당 소속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국민의당에서 탈당한 뒤 민주평화당으로 소속을 옮겼다.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물러나 있다가 2022년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했다. 복당 뒤 2024년 제22대 총선에서 전주시병 지역구에 출마·당선돼 5선에 성공했다.

이후 2025년 이재명 정부에서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지명되면서 20년 만에 통일부 장관으로 재입각하게 됐다.

경영활동의 공과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신임 통일부 장관이 2025년 7월25일 취임식을 앞두고 판문점을 찾아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통일부>
△다시 통일부 장관에 올라
정동영이 다시 한번 통일부 장관을 맡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5년 7월25일 정동영에 대한 장관 후보자 임명안을 재가했다.

정동영은 같은 날 이재명 대통령의 임명안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경기 파주 판문점으로 향했다. 유엔군사령부(유엔사) 등 관계자들과 함께 판문점 내 자유의집·평화의집 등을 돌아본 뒤 남북 간 연락 채널 상황을 점검했다.

정동영은 판문점에서 “앞으로 유엔사 등 유관기관 간 긴밀한 협조하에 판문점 공간을 단절과 긴장의 장소가 아니라 연결과 협력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정동영은 이어 남북 직통전화실을 방문해 '단절'된 직통전화 수화기를 직접 들어 귀에 대는 등 판문점 채널 복원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정동영은 판문점 방문 뒤 취재진을 만나 “전화기를 들고 (통화 버튼을) 세 번 길게 눌러봤다. 전화선이 절단된 것인지, 벨이 울려도 (북측이) 받지 않는 것인지 (모를) 침묵의 전화였다”고 소회를 말했다.

정동영은 이어 “너무 긴 침묵이었다”며 “신속히 연락 채널을 복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판문점은 1971년 남북적십자 접촉을 시작으로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해 총 370여 차례의 남북회담이 열린 장소다. 정동영은 취임식에 앞서 장관 임명 후 첫 행보로 판문점을 찾은 것은 북측에 남북 대화 재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판문점 방문 일정을 마친 정동영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임식을 갖고 44대 통일부 장관에 공식 취임했다.

정동영은 이날 취임식에서 “이제 정책적 대전환을 통해 실종된 평화와 무너진 남북관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며 ‘남북간 평화 공존’, ‘평화 경제와 공동성장’, ‘국민주권 대북정책’으로 구성된 3대 대북정책 방침을 내놨다.

그는 이어 “통일부 장관으로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반도평화특사의 역할도 적극 해 나갈 것”이라며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을 함께 열어나가길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정동영은 통일부 조직 역량의 회복, 조직 문화의 치유, 조직의 성장을 약속했다.

정동영은 통일부 조직을 두고 “축소되고 왜곡됐다”며 “조직의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윤석열 정부는 내란을 통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통일부 무력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의 마지막 버팀목까지 부러뜨렸다”며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복원, 이를 위한 통일부 정상화는 시대적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2025년 6월23일 정동영을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언론 브리핑에서 “정 후보자는 누구보다도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인물”이라며 “북한과 대화 여건을 조성하고 한반도 긴장 완화 돌파구를 마련할 적임자”라고 소개했다.

이에 정동영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오늘 이재명 국민주권정부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2004년 통일부 장관 임명에 이어 20년이 지나 2025년에 다시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며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엄혹하고, 동시에 이재명 국민주권정부에 대한 기대는 높기만 하다. 그렇기에 20년 전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제22대 총선에서 5선 고지 올라
정동영이 22대 총선에서 당선돼 5선 고지에 올랐다.

정동영은 2024년 3월13일 현역의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당내 경선에서 꺾고 전주시 병 지역구 공천을 받는 데 성공하면서 5선에 도전하게 됐다. 정동영은 4년 전 제21대 총선에서 김성주 의원과 겨뤄 낙선한 바 있다.

그리고 정동영은 2024년 4월10일 11만7407표를 받아 당선되면서 5선에 성공했다. 전국 최다득표였다.

정동영의 최다득표 기록은 이번이 세 번째다. 정치적 고향인 전주에서 최초로 도전한 1996년 15대 총선에서 9만7858표를 얻어 최다 득표했고 4년 뒤인 16대 총선에서도 9만8746표를 얻어 연거푸 최다득표 기염을 토했다.

정동영은 2025년 4월10일 전주시 선거사무소에서 “최다득표까지 안겨주신 것은 어머니의 품 같은 전주에서 시민 여러분이 일궈내 주신 것이지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라며 “전주 시민들과 국민들께서 허리 한번 쭉 펴고 ‘살 만 하다’는 말씀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5선 중진 의원이 된 만큼 나의 정치보다는 후배들과 동료들이 멋진 정치를 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이 돼 주는 게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우리 정치는 목소리가 실종돼 있다는 비판이 많기 때문에 더 겸허하고 섬세하게 민심을 추스리는데 진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7년 만에 친정으로 복귀, 더불어민주당 복당
정동영이 2020년 치뤄진 제21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7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왔다.

정동영은 2022년 1월17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했다. 천정배, 김관영 등 복당식을 치른 다른 국민의당 출신 복당 인사들과는 달리 별도의 복당식을 열지 않았다. 선거대책위원회의 선거운동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정동영은 2022년 1월 복당을 신청하면서 발표한 입장문을 통해 “이재명 후보를 도와 4기 민주정부를 창출하는 데 티끌만한 힘이라도 보태고자 민주당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재명 정부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굳은 신념 아래 외교적 총력을 기울여 개성공단을 다시 열고 북핵 해결을 위한 대화 테이블을 열어 마침내 한반도 평화공동체의 길을 개척해 내리라 믿는다”며 “이재명 후보의 승리를 통해 한반도의 운명이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확고한 평화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정동영은 2022년 지방선거에서 차기 전북도지사 후보로 꼽혔지만 결국 출마하지 않았고. 대신 2022년 5월9일 민주당 전북도지사 후보로 선출된 김관영 후보 캠프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2024년 1월2일 전주시 병에 공식 출마 선언을 했고 당내 경선에서 현역이었던 김성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맞대결 후 승리해 22대 총선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게 됐다.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민생당 전주병 국회의원 후보가 2020년 4월16일 전북도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낙선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21대 총선에서 낙선
정동영이 2020년 제21대 총선을 맞아 기호 3번을 달고 전주시 병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정동영은 민주평화당이 ‘민생당’으로 2020년 2월24일 통합 창당하게 돼 제21대 총선에서는 기호 3번 민생당 후보로 출마했다.

정동영은 2020년 4월15일 제21대 총선에서 5만4017표(34.61%)를 얻는 데 그쳐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밀리며 2위로 낙선했다.
김성주 당선인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지내며 체급을 키워왔다.

정동영은 에코시티 쪽 투표소에서만 앞서고 나머지 지역에서 밀렸다. 아울러 본인 선거 이력 사상 전주에서 처음으로 패배했다. 전북을 지지기반으로 둔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집권 여당 대선 후보를 지냈던 정동영이 자신의 텃밭에서 패배한 것이다.

정동영은 2020년 4월16일 전북도의회에서 민생당 전북지역 총선 후보들과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총선에서 한국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앞장섰던 선거제 개혁이 함께 침몰해 안타깝다. 다당제를 통한 정치 개혁은 실패했다”면서도 “그러나 씨앗은 뿌려졌다. 머지 않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것이다. 그게 저희의 마지막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정동영은 2025년 4월15일 낙선 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전주 시민에게 진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멈추게 된 점 가슴 아프고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민주평화당 총선 1호 공약으로 ‘20평 아파트 100만 호 1억 원에 공급’ 내걸어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2020년 1월20일 제21대 총선 1호 공약으로 ‘20평 아파트 100만 호를 1억 원에 공급’ 방안을 내놨다.

민주평화당의 총선 1호 공약은 공공부문이 토지를 보유한 채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으로 주택 공급을 추진해 집값을 안정시키면서 무주택 서민, 청년, 신혼부부 등의 주거 불안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소비자 분양 대금으로 건축비를 마련한 뒤 다른 사업비는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등 공적 기금을 활용해 재원을 마련한다는 계획도 함께 내놨다.

정동영은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약을 공개하며 “기존의 분양 위주 또는 민간 건설사 위주의 공공주택 개발 방식을 탈피해 저렴한 공공주택 공급, 공공의 자산 증가를 기초로 하는 주택 공급 방식의 대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19년 12월12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선거법 개정안 본회의 상정 및 후퇴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4+1 협의체를 통해 선거법 개정안 통과 앞장서
정동영은 민주평화당 대표로서 2019년 12월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정의당, 대안신당 등과 함께 구성한 ‘4+1 협의체’를 통해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다.

앞서 정동영은 201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민주평화당의 역사적 소명은 선거제 개혁에 있다”고 말했다.

선거법 개정안의 본회의 통과는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의 반대 탓에 순탄치 않았다.

자유한국당은 선거법 개정안, 검찰개혁 법안 등 패스트트랙 법안의 처리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벌였다.

패스트트랙으로 본회의 처리가 지연되면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선거법 개정안보다 검찰개혁 법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정동영은 이 원내대표의 제안에 “지난 4월 패스트트랙 법안을 상정할 때 분명한 합의문이 있다”며 “선거법 개정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것으로 이를 뒤집을 수는 없다”고 반발했다.

4+1 협의체가 선거법 개정안의 구체적 내용을 놓고 합의를 보는 과정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석패율제 도입과 구체적 연동률, 연동률 캡 등을 놓고 협의체 내 정당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결국 '연동률 50%, 연동률 캡 30석'으로 4+1 합의체 내 정당들이 합의를 봤고 선거법 개정안은 2019년 12월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평화당 비당권파 의원 10명 집단 탈당
정동영이 민주평화당 대표를 맡고 있던 시절,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 소속 민주평화당 의원 10명이 2019년 8월12일 집단으로 탈당했다.

당시 탈당한 의원은 원내대표였던 유성엽 의원을 비롯해 천정배, 박지원, 장병완, 김종회, 윤영일, 이용주, 장정숙, 정인화, 최경환 의원 등이다.

정동영은 의원들의 집단 탈당을 놓고 “10명의 의원이 탈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참으로 유감”이라면서도 “민주평화당은 구태정치로부터 해방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비당권파 의원들은 2020년 총선에서 바른미래당과 노선과 공천권 문제 등으로 갈등이 깊어졌다.

비당권파 의원들은 당 운영 방식을 놓고도 정동영을 비판했다. 정동영이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주현 최고위원을 임명하는 등 당을 일방적으로 운영한다며 2019년 6월17일부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민주평화당 대표 당선
정동영은 2018년 8월5일 민주평화당 전당대회에서 최경환, 유성엽, 민영삼, 이윤석, 허영 등과 경쟁해 68.57%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민주평화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로써 정동영은 10여 년 만에 중앙정치 무대에 복귀했고, 나중에 2020년 제21대 총선에서도 민주평화당을 이끌었다.

정동영은 당대표 공약으로 내세운 ‘현장으로 달려가는 민주평화당’이라는 구호처럼 대표 선출 다음 날인 8월6일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 최고위원회의로 첫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은 ‘희망버스’로 상징되는 한진중공업과 쌍용차 해직자 분향소가 마련돼 있는 곳이다.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을 방문한 뒤 김해 봉하마을로 이동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하고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시민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정동영은 2018년 9월 3차 남북 정상회담에 정당 대표로 참가해 북한을 방문했다.

정동영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서울에 오시면 환영받을 것”이라는 환담을 건넸다. 김 위원장은 “아직 서울에서 환영받을 만큼 일을 하진 못했다”고 대답했다.

△국민의당 탈당과 민주평화당 입당
정동영은 2018년 2월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국민의당 개혁파가 추진한 민주평화당에 합류했다.

정동영은 2016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국민의당을 선택했으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보수정당에 뿌리를 둔 바른정당과 합당하려 하자 국민의당을 탈당했다.

안 대표가 대표 자리를 걸고 합당을 결정하는 당원 투표를 제안하자 정동영은 “안철수의 불통 정치, 박정희식 골목 독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정동영은 박지원 의원 등 합당 반대 세력과 함께 평화개혁연대를 출범했다. 평화개혁연대는 2018년 2월6일 민주평화당을 창당했다.

정동영은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평화당 전북도지사 후보로 차출될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직접 출마하는 대신 민주평화당 후보들의 유세를 지원했다.

민주평화당은 기초자치단체장 5석과 광역자치단체 의원 3석, 기초자치단체 의원 49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국민의당에 입당한 정동영 전 의원이 2016년 6월22일 오전 광주 서구 국민의당 광주시당사에서 당내 예비후보자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당으로 정계 복귀
정동영은 2016년 2월18일 안철수의 국민의당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앞서 정동영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관악을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지만 3위로 낙선하면서 고향인 순창군에서 자숙기를 보냈다.

정동영은 2016년 4월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전주병 지역구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했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47.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4선에 성공했다.

정동영은 국민의당 소속이 된 뒤 2017년 7월 정부의 사드 배치를 비판했다. 정동영은 4년8개월 만에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안보 목적으로 사드 배치를 했지만 오히려 안보와 국익 두 마리 토끼를 놓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동영은 2017년 8월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도전장을 냈으나 안철수 후보에 700표가량 차이로 2위로 밀려 낙선했다. 다만 호남권, 특히 전북 지역의 절대적 지지를 확인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확인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취임 후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하자 정동영은 언론 등을 통해 안철수 대표를 비판했다. 같은 해 10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과의 합당이 사실상 무산되자 정동영은 안 대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 출마
정동영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합민주신당(현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출마했으나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정동영은 2007년 7월3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중산층과 통하는 대통령’, ‘중소기업과 통하는 대통령’, ‘중용의 정치로 통합력을 발휘하는 대통령’이라는 3중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적극적인 중산층 창출 정책으로 5년 안에 중산층이 70%인 나라를 만들 것”이라며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 시대와 비교되는 ‘중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2007년 10월15일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 이해찬 손학규 후보를 꺾고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후보 수락연설에서 “돈있고 땅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약육강식 경제, 이명박식 경제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이명박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하는 등 여론이 좋지 않았다.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열린우리당이 흡수됐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당시 민주당 탈당파와 한나라당 탈당파가 함께 있는 상황이었다.

정동영은 대선 투표 결과 이명박 후보와 530만 표 차이를 보이며 2위에 머물렀다. 이는 2017년 치러진 19대 대선 전까지 대선에서 1위와 2위의 최다 격차로 남았다. 여당의 지지율 약세와 호남 출신 후보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이 2006년 2월18일 서울 올림픽 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신임 의장으로 선출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정부에서 열린우리당 의장, 통일부 장관 역임
정동영은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의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통일부 장관도 맡았다.

열린우리당은 2003년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면서 분당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열린우리당으로 당을 옮김에 따라 열린우리당이 새로운 여당이 됐다.

정동영은 열린우리당에서 초대 의장을 맡았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으로 지지율이 상승세를 이어가며 2004년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차지했다. 과반 의석은 확보했으나 개헌선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정동영은 2004년 7월 통일부 장관에 취임했다.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도 같이 맡았기 때문에 부총리급 위상이었다.

정동영은 1994년 기자로서 통일부를 출입했는데 10년 뒤 장관이 됐다. 취임 직후 468명에 이르는 대규모 탈북자가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입국하면서 북한이 ‘최대 적대행위’로 규정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으나 2004년 12월 개성공단을 첫 방문하는 등 개성공단 활성화에 기여했다.

정동영은 2005년 12월 지방선거를 위해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했다. 이듬해 2월 다시 한번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책 등으로 여당을 향한 여론이 좋지 않았고 결국 열린우리당은 광역자치단체장을 고작 1석만 차지하는 등 대패했다. 정동영은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2006년 6월 열린우리당 의장에서 물러났다.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정계 입문
정동영은 1996년 당시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다.

정동영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주시 덕진구로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9만7857표)를 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 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새천년민주당에서 천정배, 신기남 의원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의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2000년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까지 올랐다.

정동영은 이런 인지도를 바탕으로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에 밀려 대선후보가 되지 못했다.

△문화방송(MBC) 기자로 활약
정동영은 1978년 문화방송에 입사해 기자에서 앵커가 됐다.

정동영은 기자 시절 5·18 민주화운동 현장의 특파원으로 취재했지만 취재 내용은 보도되지 못했다. 정동영은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다 마감뉴스 0시 앵커를 맡기도 했다.

정동영은 워싱턴 특파원으로 지내면서 웨일스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걸프전과 독일 통일 등 역사적 사건을 현장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귀국한 뒤 뉴스 앵커로 지내면서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순발력 있게 현장 중계하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2025년 11월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우고 아스투토 신임 주한 유럽연합(EU) 대사를 접견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통일부>
정동영은 남북 간 연락 채널 상황을 복구하고자 한다.

특히 단절된 판문점 채널 복원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에 정동영은 2025년 7월25일 통일부 장관 임명안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경기 파주 판문점을 방문해 남북 간 연락 채널 상황을 점검했다.

판문점은 1971년 남북적십자 접촉을 시작으로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해 총 370여 차례의 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남북 간 가장 기본적인 소통 채널로 여겨지는 남북 직통전화가 설치돼 있기도 하다.

남북관계가 경색되지 않은 시기에는 평일 기준 매일 오전과 오후에 개시 및 마감 통화가 이뤄져 왔다. 그러나 윤석열정부 때인 2023년 4월7일 북한 측이 일방적으로 소통을 끊으면서 2025년 11월16일 현재 약 1천 일째 불통 상태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 장관이 남북 간 대화를 상징하는 공간인 판문점을 취임 첫 일정으로 찾은 것을 두고 한반도에서 적대적인 대결 상황을 종식하고 대화 재개를 위한 모멘텀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정동영은 이를 위해서는 남북관계를 정상화 해야 한다. 북한과 대화 여건을 조성하고 한반도 긴장 완화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정동영은 2025년 7월2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44대 통일부 장관 취임식에서 “이제 ‘정책적 대전환’을 통해 실종된 평화와 무너진 남북관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며 ‘남북간 평화 공존’, ‘평화 경제와 공동성장’, ‘국민주권 대북정책’으로 구성된 3대 대북정책 방침을 내놨다.

그는 “통일부 장관으로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반도평화특사’의 역할도 적극 해 나갈 것”이라며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을 함께 열어나가길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정동영은 또 통일부 조직을 재정비해야 한다. 정동영은 앞서 윤석열정부에 의해 통일부 조직이 축소되고 왜곡됐다며 조직의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에 정동영은 통일부 조직 역량의 회복, 조직 문화의 치유, 조직의 성장을 약속했다.

◆ 평가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2025년 10월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부호 주한 베트남 대사를 접견하며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동영은 전북이 낳은 ‘스타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정동영은 1996년 제15대 총선 때 정계에 입문, 17대 대선, 18대 총선, 두 번의 재보궐 선거에 이어 21대 총선까지 총 10번 출마해 4번 당선되고 5번을 낙선했다(한번은 비례대표 사퇴). 그는 전주에서 출마하면 모두 당선됐으나 대통령 선거나 서울에서 출마할 때는 모두 패했다.

아울러 정동영은 현장형 정치인으로도 평가받는다.

정동영은 노동과 환경, 통일 문제와 관련된 모든 현장에 직접 찾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히 얼굴만 비추고 언론 보도를 위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현장에서 당사자들과 함께한다.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경기 파주 판문점을 찾은 것도 이런 현장정치를 하기 위함인 것으로 풀이된다.

정당을 자주 옮긴 탓에 ‘철새’라는 비판도 받는다.

새정치국민회의로 정치인 생활을 시작해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무소속,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무소속, 국민모임, 국민의당, 민주평화당을 거쳐 2025년 현재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민주당이 이름이 자주 바뀐 것도 있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이동이 잦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정동영은 2015년 3월 철새라는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정확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새라며 정치적 노선으로는 일관적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개성공단의 출발에 기여한 점을 가장 큰 업적으로 꼽는다. 정동영은 2004년 7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개성공단은 2003년 6월에 착공식을 한 뒤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이던 2004년 10월부터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사무소를 개소했다. 2004년 12월에는 시범단지 분양기업의 생산품이 처음으로 반출됐다. 2005년 9월에는 본단지 1차 24곳 입주기업이 선정됐다.

종교는 천주교로 다윗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다.

혈액형은 A형이다. 주량은 맥주 1병,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다른 의견은 존중하고 같은 의견을 함께 추구한다는 의미의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사건사고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2025년 11월14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예산안 관련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태양광 지원법안 이해충돌 논란
정동영이 배우자와 자녀가 태양광 관련 회사를 운영하는 상황에서 해당 업계에 혜택을 줄 수 있는 법안을 공동발의한 사실이 확인돼 이해충돌 논란이 일었다.

2025년 6월25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정동영은 같은해 3월 ‘영농형 태양광 발전사업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을 공동발의했다.

영농형 태양광은 농지를 경작하면서 동시에 태양광 발전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그동안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짧은 태양광 설비 사용 기한(최대 8년)이 사업 확산의 걸림돌로 지적돼 왔다.

정동영이 발의한 법안은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사용 기한을 23년까지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국가와 지자체가 태양광 관련 컨설팅 제공자를 지원하고 교육 및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규정도 포함돼 있다.

정동영의 부인 민혜경씨는 태양광 관련 업체 ‘빛나라 에너지’의 대표이사로 등재돼 있다. 두 아들도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 회사는 2020년 전북 전주에 설립됐고 민씨는 정동영의 지역구인 전주시 덕진구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이사진은 세 가족뿐이다. ‘가족 법인’인 셈이다.

2025년 3월27일 공개된 관보를 보면 민씨는 강원 평창군, 전북 정읍시, 충남 부여군, 충북 음성군에 9564.6m²(약 2893평)의 토지를 소유했고 해당 지역에 신재생태양광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법안은 주민참여조합 등 공동체 기반 태양광 발전을 제도화하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으나 법 통과 시 기존 업체도 직간접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졌다.

특히 발의된 법안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영농형 태양광 발전사업의 지원을 위해 컨설팅 등을 하는 자에게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 ‘국가 및 지자체는 주민 수용성 제고를 위해 태양에너지 발전설비 등에 대한 교육 및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민씨의 회사는 ‘태양광 발전 및 운영 컨설팅업’, ‘태양광 발전소 컨설팅업’, ‘에너지 교육인력 양성업’을 사업목적으로 두고 있다.

이에 정동영은 2025년 7월14일 국회에서 열린 자신의 인사청문회에서 “공동발의한 영농형 태양광 지원법은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농가소득을 증대시켜 농촌 소멸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여야 의원 7명이 법안을 냈고 82명이 공동 발의로 참여했다. 저도 82명 중에 한 사람”이라며 “영농형 태양광과 제 아내가 소유하고 있는 태양광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제 아내가 소유한 태양광 발전시설은 중고 태양광발전시설로 생존형, 생계형 호구지책으로 매입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우자 명의로 농지 위장전입
정동영이 배우자 이름으로 농지를 취득한 것과 관련해 특혜 의혹들이 제기됐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2025년 7월14일 국회에서 열린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배우자 이름으로 농지를 취득한 것과 관련해서 특혜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며 “(전북 순창군) 농지를 취득하기 위해 위장전입한 것 같다. 같은 주소지에서 전 소유주와 부부가 어떻게 같이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어 “농지를 사놓고 재산 신고를 하지 않아 공직자재산등록 법률도 위반했다”며 “도둑질한 사람이 능력이 있다고 장관이 돼서는 안 되고 불법으로 농지를 취득해 전용하는 사람이 장관이 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정동영은 위장전입을 인정했다.

정동영은 “전 소유주는 동네 이장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 (위장전입이)맞다, 제 불찰”이라면서도 “전주에서 살아도 농지는 취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동연은 재산 신고가 안 된 농지에 대해서는 “(계약) 잔금을 줬지만, 아직 등기가 안 넘어온 상태라 재산등록에 누락이 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 음주 운전
정동영이 민주평화당 대표로 있을 시절,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의 음주 운전 사건이 터져 민주평화당에 부담을 안겼다.

이용주 의원은 2018년 10월31일 오후 10시55분 올림픽대로 동호대교에서 잠실 방향으로 가는 차량 가운데 음주가 의심되는 차량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적발됐다. 당시 이용주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089%로 면허정지 수준이다.

논란이 커지자 정동영은 2018년 11월2일 “이 의원의 음주 운전 문제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용주를 당기윤리심판원에 회부에 징계 여부와 수위를 정하기로 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지각 논란
정동영은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 정당 대표로 동행했다. 하지만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함께 잡아둔 회담 일정을 어겨 논란이 됐다.

9월18일 여야 3당 대표는 3시30분 만수대의사당에서 안동춘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리금철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림룡철 조국통일위원회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 부국장과 면담하기로 했으나 면담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안동춘 부의장은 취재진에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으며 북측 관계자들은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3당 대표들은 일정에 착오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윤영찬 청와대 홍보수석이 앞서 직접 면담일정을 브리핑한 데다 1시간 이상 늦은 데 비판이 제기됐다.

여야 3당 대표는 9월19일 같은 장소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안동춘 부의장, 리금철 부위원장과 면담을 했다. 김 상임위원장은 2005년 통일부 장관 시절 정동영과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김 상임위원장은 “다른 동무들을 통해 들었는데 남녘에서 정동영 선생이 지금 무슨 활동을 벌이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백의종군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그러더라”며 웃었다. 정동영이 “10년 전에 뵀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하자 김 상임위원장은 “통일 위업을 성취할 때까지 영원히 이 모습대로 활기 있게 싸워나가자”며 “민족의 대의는 통일”이라고 말했다.

△노인 폄하 논란
정동영은 노인의 투표권을 무시하는 발언을 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정동영은 2004년 3월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일보의 대학생 총선기자단 팀과 인터뷰에서 "(이번 총선에서) 60대 이상 70대는 투표를 안 해도 괜찮다"며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된다"고 말했다.

정동영은 20대와 30대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해명했지만 대한노인회 등에서 정동영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며 항의 집회를 열었다.

한선교 한나라당 대변인은 "정 의장 발언은 60~70대를 반대세력으로 선전하며 20~30대 결집을 유도한 의도적 발언으로 의심된다"고 공격했다.

박영선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60, 70대를 거론한 부분은 어린 학생기자들에게 미래의 주역임을 강조하다 나온 얘기”라며 “정치적 관심이 높은데도 정작 투표는 잘 안 하는 20, 30대에게 투표를 하도록 독려하려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발언의 파장이 커지자 정동영은 결국 비례대표 후보를 사퇴해 17대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20년 1월1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4년 유신 반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1978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했다.

1980년 MBC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1983년 MBC 뉴스데스크 보조앵커가 됐다.

1986년 MBC 0시뉴스 앵커를 맡았다.

1989년 MBC LA특파원으로 활동했다.

1993년 MBC 통일전망대 앵커가 됐다.

1994년 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다.

1996년 국민회의 당무위원이 됐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전북 전주시 덕진구, 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을 지냈다.

1996·1998∼1999년 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았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이 됐다.

2000∼2004년 제16대 국회의원(전북 전주시 덕진구,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을 지냈다.

2000년 한국인터넷정보학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 됐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을 지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2003년 제33차 다보스세계경제포럼(WEF)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특사가 됐다.

2003년 열린우리당 영입추진위원장을 지냈다.

2004년 열린우리당 의장이 됐다.

2004년 열린우리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2004∼2005년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2004∼2005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겸임을 맡았다.

2005년 제34차 다보스세계경제포럼(WEF) 노무현 대통령 특사가 됐다.

2005년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정부위원을 지냈다.

2005년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2006년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겸임교수을 지냈다.

2006년 열린우리당 의장이 됐다.

2006∼2007년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현 더불어민주당) 제17대 대통령 후보가 됐다.

2008년 민주당 서울동작구을 지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8년 민주당 상임고문이 됐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서울 동작구을, 민주당)했다.

2008년 미국 듀크대로 연수를 떠났다.

2009년 제18대 국회의원(전북 전주시 덕진구, 무소속·민주당·민주통합당)이 됐다.

2010∼2011년 민주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0∼2011년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2011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됐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서울 강남구을, 민주통합당)했다.

2012년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미래캠프’ 산하 남북경제연합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2013년 민주당 상임고문을 지냈다.

2014∼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6·4지방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이 됐다.

2015년 4·29재보선 국회의원선거에 출마(서울 관악구을, 무소속)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전북 전주시병, 국민의당·민주평화당<2018.2>·민생당<2020.2>)이 됐다.

2016∼2018년 국민의당 전북전주시병 지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6·2018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2016년 한국아동인구환경의원연맹(CPE) 부회장이 됐다.

2016∼2017년 국회 미래일자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6년 국회 동북아평화협력의원외교단장을 지냈다.

2017년 국민의당 국가대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이 됐다.

2017년 한·EU의원외교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2017년 국민의당 제19대 안철수 대통령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이 됐다.

2018년 민주평화당 전북전주시丙지역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18년 민주평화당 GM군산공장폐쇄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8년 민주평화당 지방선거인재영입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2018년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2018∼2020년 민주평화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냈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전북 전주시병, 민생당)했다.

2022년 9월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됐다.

2022년 9월 사단법인 대륙으로가는길 제3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22년 11월 완주전주통합추진연합회 고문을 지내고 있다.

2024년 5월 제22대 국회의원(전북 전주시병, 더불어민주당)을 맡고 있다.

2024년 6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있다.

2025년 한미의원연맹 공동회장이 됐다.

2025년 4월 더불어민주당 제21대 대통령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됐다.

2025년 7월 통일부 장관이 됐다.

◆ 학력

1966년 전주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69년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했다.

1971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9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나왔다.

1988년 영국 웨일스대학교 카디프대학원에서 언론정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전라북도 도의원을 지낸 정진철씨와 이형옥씨 사이 4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81년 6월14일 민혜경씨와 결혼해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장남 정욱진씨는 스탠포드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뒤 콜롬비아대학교에서 로스쿨을 졸업했다.

차남 정현중씨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 상훈

2020년 2019 입법및정책개발 우수국회의원상을 받았다.

◆ 기타

2025년 7월1일 국회에 제출된 인사청문요청안을 보면 정동영은 자신과 배우자 명의 재산으로 21억9787만 원을 신고했다.

정동영은 본인 명의 서울 강남구 도곡동 아파트 17억 원과 정치자금 1억4856만 원을 포함한 예금 2억9645만 원, 사인간 채권 5억820만 원을 신고했다. 전북 순천 구림면 전답과 대지, 임야(7780만 원)와 도곡동 아파트 임대채무(9억 원), 금융채무(6억2489만 원)도 있었다.

정동영의 배우자는 강원도 평창과 전북 정읍, 충남 부여, 충북 음성에 신재생태양광발전소 9억4366만 원을, 해당 부지 등으로 3억810만 원을 신고했다.

저서로 ‘바이든 시대 한반도의 길’(2021), ‘정동영 아저씨의 한반도 통일 이야기’(2014), ‘10년 후 통일’(2013), ‘중산층 나라를 만들겠습니다’(2007),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2007), ‘개나리 아저씨’(1999) 등이 있다.

육군 제33보병사단(현 17사단) 사단 본부대 행정병으로 군 복무를 시작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논문 ‘A comparative study of BBC and MBC news’로 1988년 영국 웨일스대학교 카디프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어록
[Who Is ?] 정동영 통일부 장관
▲ 정동영 신임 통일부 장관이 2025년 7월25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정책적 대전환’을 통해 실종된 평화와 무너진 남북관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통일부 장관으로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반도평화특사’의 역할도 적극 해 나갈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을 함께 열어나가길 희망한다. (통일부 조직은) 축소되고 왜곡됐다. 조직의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윤석열정부는 내란을 통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통일부 무력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의 마지막 버팀목까지 부러뜨렸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복원, 이를 위한 통일부 정상화는 시대적 과제가 됐다.” (2025/07/25,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44대 통일부 장관 취임식에서)

“앞으로 유엔사 등 유관기관 간 긴밀한 협조하에 판문점 공간을 단절과 긴장의 장소가 아니라 연결과 협력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전화기를 들고 (통화 버튼을) 세 번 길게 눌러봤다. 전화선이 절단된 것인지, 벨이 울려도 (북측이) 받지 않는 것인지 (모를) 침묵의 전화였다. 너무 긴 침묵이었다. 신속히 연락 채널을 복구해야 한다.” (2025/07/25, 경기 파주 판문점에서 남북 간 연락 채널 상황을 점검하며)

“공동발의한 영농형 태양광 지원법은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가소득을 증대시켜 농촌 소멸을 막기 위한 것이다. 여야 의원 7명이 법안을 냈고 82명이 공동 발의로 참여했다. 저도 82명 중에 한 사람이다. 영농형 태양광과 제 아내가 소유하고 있는 태양광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제 아내가 소유한 태양광 발전시설은 중고 태양광발전시설로 생존형, 생계형 호구지책으로 매입한 것이다.” (2025/07/14, 국회에서 열린 정동영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해명하며 태양광지원법안 이해충돌 논란을 해명하며)

“오늘 이재명 국민주권정부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2004년 통일부 장관 임명에 이어 20년이 지나 2025년에 다시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엄혹하고, 동시에 이재명 국민주권정부에 대한 기대는 높기만 하다. 그렇기에 20년 전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2025/06/23, 이재명정부가 정동영을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자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최다득표까지 안겨주신 것은 어머니의 품 같은 전주에서 시민 여러분이 일궈내 주신 것이지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전주 시민들과 국민들께서 허리 한번 쭉 펴고 ‘살 만 하다’는 말씀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5선 중진 의원이 된 만큼 나의 정치보다는 후배들과 동료들이 멋진 정치를 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이 돼 주는 게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정치는 목소리가 실종돼 있다는 비판이 많기 때문에 더 겸허하고 섬세하게 민심을 추스리는데 진력할 것이다.” (2024/04/10. 전주시 선거사무소에서 22대 총선 당선 소감을 밝히며)

이재명 후보를 도와 4기 민주정부를 창출하는 데 티끌만한 힘이라도 보태고자 민주당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재명정부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굳은 신념 아래 외교적 총력을 기울여 개성공단을 다시 열고 북핵 해결을 위한 대화 테이블을 열어 마침내 한반도 평화공동체의 길을 개척해 내리라 믿는다. 이재명 후보의 승리를 통해 한반도의 운명이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확고한 평화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2022/01/17,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신청하면서 발표한 입장문에서)

“이번 총선에서 한국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앞장섰던 선거제 개혁이 함께 침몰해 안타깝다. 다당제를 통한 정치 개혁은 실패했다”면서도 “그러나 씨앗은 뿌려졌다. 머지 않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것이다. 그게 저희의 마지막 자부심이다.” (2020/04/16, 총선 낙마 뒤 전북도의회에서 민생당 전북지역 총선 후보들과 기자회견을 갖고)

“전주 시민에게 진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멈추게 된 점 가슴 아프고 송구스럽다.” (2020/04/15,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21대 총선 패배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선거제 개혁이 명령하고 있는 본격적 다당제 시대의 개막을 위해 제3의 축이 필요하다. 민주평화당은 통합을 위해 분명한 원칙을 제시하면서 선거제 개혁 이후 새로운 정치판을 짜는데 능동적 자세로 나설 것이다.” (2020/01/30,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어떤 정치든 명분과 가치가 먼저인데 반문연대만으로는 명분이 될 수 없다. 민주평화당은 개혁연대의 길을 생각한다.” (2020/01/22, 국회에서 열린 ‘연동형 선거제 흔드는 꼼수정당 퇴치를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선거제 개혁을 만들어낸 민주평화당이 이번 총선에서 힘을 얻게 되면 분권형 대통령제로 가겠다. 정치개혁과 다당제는 민주평화당의 존재 이유다.” (2020/01/14, 전북 전주시온성교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전주시민 정치개혁 보고대회’에서)

“호남에서 민주평화당과 더불어민주당의 1대1 구도를 만들겠다.” (2020/01/07, 전북도당에서 열린 신년 하례식에서)

“문재인 정부 집권 2년 만에 서울에서 1천조 원, 전국에서 2천조 원 땅값이 상승했다. 해방 이후 단기간에 최고로 땅값을 올렸다.” (2019/12/03, 국회에서 열린 경제정의 실천 시민연합과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지난 4월 패스트트랙 상정에는 분명한 합의문이 있었다. 선거제 개혁 선 처리 뒤 사법개혁이 명백한 여야4당의 합의다. 이를 뒤집을 수 없다.” (2019/10/14,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오늘 민주평화당은 구태정치로부터 해방을 선언한다.” (2019/08/12,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당내 비당권파의 집단 탈당을 놓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제3당을 목표로 총선을 준비하겠다. 바른미래당 내 개혁그룹, 정의당, 시민사회와 힘을 모으고 녹색당과 청년당을 포함해 새로운 정치세력과도 연대, 연합하겠다.” (2019/08/05, 당 대표 취임 1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와 5당 대표 회동이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자리에서 선거제 개혁과 함께 권력 분산을 위한 헌법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할 것이다.” (2019/07/15,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북핵 문제 해결에 대화와 평화가 아닌 플랜B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 (2019/05/06, 호주 시드니 스트라스필드 골프클럽 연회장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바른미래당이 내부 정리가 된다면 국민의당 시절 한솥밥을 먹던 분들과는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당 대 당 통합으로 갈 수 있다고 본다.” (2019/04/11, BBS라디오 ‘이상휘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거대 양당은 서민경제에는 관심 없고 기득원 유지와 창출만을 위해 늘 싸우는 정치만 하고 있다. 기득권 정치를 깨트리려면 다양한 계층이 국회로 가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당제가 정착돼야 한다.” (2019/03/27, 민주평화당 충북도당 개편대회에서)

“5·18 희생자들을 짓밟은 극우 보수 세력 준동에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은 하늘에서 개탄하고 있을 것이다.” (2019/02/20,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민주평화당의 역사적 소명은 선거제 개혁에 있다.” (2019/01/16, 201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힘없고 돈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약자 편에 서라고 정동영에게 기회를 주셨다고 믿는다. 정의당보다 더 정의롭게 가는 것이 평화당의 목표이며 민주당의 우클릭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 (2018/08/05, 민주평화당 대표로 선출된 자리에서)

“이제 가면무도회는 끝났다. 안철수 대표는 지금까지 써온 개혁과 합리의 가면을 벗고 보수와 우향우의 길을 가고 있다. 정당은 정체성을 먹고 산다.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바로 국민의당을 접고 민주평화당의 깃발을 올린 이유다.” (2018/02/08, 전북일보의 기고문에서)

“정당이라는 것은 정체성이 핵심이다. 묻지마 통합이라는 것은 정체성 변경을 야기하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다. 정당이 사람 몸으로 말하면 척추에 해당하는 것이 정체성인데 정체성을 가볍게 여기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2017/10/26,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김혜영입니다’에서 바른미래당과 통합 무산을 놓고 한 인터뷰)

“사드는 하나의 무기체계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겹겹이 둘러싼 국제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구조를 뒤흔드는 문제다. 사드 배치를 배치한 뒤 경제가 흔들리고 북한 비핵화의 문이 닫히고 평화통일의 길은 영영 멀어지게 된다면 아무리 대통령이 결정했다 해도 국민 대표인 국회가 초당적으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시대착오적 대결 구도가 다시 한반도 주변으로 형성된 것이다. 미래로 가야 하는데 왜 지구상에서 한반도만 후퇴하는가.” (2016/07/19, 사드 배치를 놓고 국회에서 열린 긴급현안 질문에서)

“참여정부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을 당시 조건부 찬성했다. 미래를 꿰뚫어 보지 못했던 안목의 부족함을 고백한다. 반성한다.” (2011/10/21,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국민 여러분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명박 당선자가 나라를 위해 잘 해주실 것을 바란다. 진실의 편에 서서 끝까지 믿고 지지해 주신 한 분 한 분 국민 여러분에게 머리 숙여 뜨거운 감사를 표한다.” (2007/12/20,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낙선한 뒤 기자간담회에서)

“창당한 뒤로부터 두 달 동안 우리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 과정에서 상처도 생겼고 분열도 생겼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만 된다면 12월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2007/10/15,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지명대회에서)

“중산층과 통하는 대통령, 중소기업과 통하는 대통령, 중용의 정치로 통합력을 발휘하는 대통령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통령상이다. 3중(三中)주의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선 과거와 구별되는 신중도 노선이 필요하다.” (2007/07/03, 제17대 대통령 출마 선언식에서)

“2007년 시대정신은 대통합이다. 대통합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 당을 떠나기로 했다. 정치 입문 11년 동안 단 한 번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우리당의 잘못된 과거와 과감하게 단절하겠다.”(2007/06/18, 열린우리당 탈당을 밝힌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인의 궁극적 목표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언론에 있을 때도 통일부 출입하며 북핵 제네바 협정 맺는 과정을 취재했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상전벽해를 느낀다. 특히 개성공단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 경제를 살리고 통일로 다가서는 새로운 희망이다. 1단계는 교류협력 경제분야에 힘쓰고, 2단계로 상대적 비대칭 분야였던 군사적 신뢰 구축에도 노력하겠다.” (2004/06/30, 통일부 장관에 취임한 뒤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20~30대 젊은이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한다고 한 말이 크게 잘못됐다. 어르신들께서 나라의 건설과 민주화에 기여했듯이 젊은이들도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2004/04/02, 노인 폄하 발언 논란에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미래는 20대와 30대들의 무대다.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꼭 그분들이 미래를 결정해 놓을 필요는 없다.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20대, 30대는 지금 뭔가 결정하면 미래를 결정하는데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투표를 해야 한다.” (2004/03/26, 총선과 관련해 노컷뉴스-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야당은 즉각 탄핵안을 철회해야 한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 사과가 있을 것이다. 노 대통령과 4당 대표와의 회담을 통해 대화로 정국을 풀어가야 한다.” (2004/03/10,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 표결을 앞두고 연합뉴스와의 전화인 터뷰에서)

“그동안 물리적 저지를 불사하겠다는 당내 의견이 있었으나 날치기와 몸싸움은 2003년으로 끝냈으면 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다수결로 탄핵안을 발의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탄핵안은 명분도 없을 뿐 아니라 국민의 지지를 받을 리 없기 때문에 발의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2004/03/09,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국CEO포럼 조찬강연회에서)

“4.15총선의 최소 목표는 대통령 탄핵저지선인 100석이며 달성하지 못하면 승리라고 볼 수 없다. 승리하지 못하면 당연히 (의장직을) 물러나겠다.” (2004/02/19,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서)

“차떼기 자금 등 불법 정치자금을 국고에 환수하는 특별법을 즉각 제정해야 하고 단호한 공천혁명을 통해 세력교체와 세대교체를 이룩해내겠다.” (2004/01/11, 열린우리당 의장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C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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