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국토안보부 요원이 지난 4일(현지시각) 조지아주에 위치한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공장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합작 베터리공장 건설현장에서 한국인 300여 명이 불법 체류자로 구금되면서, 미국에 투자하는 한국 기업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해외 반도체, 배터리 공장 건설에는 국내 전문인력이 필수적인데, 미국 전문직 취업비자(H-1B)나 주재원비자(L1·E2)를 받는 것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서 공장 건설과 가동 지연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정부가 한국인 전용 취업비자(E-4) 신설 등을 포함해 H-1B 비자 쿼터 할당 확보 등 비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다.
8일 재계 취재를 종합하면 미국 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300명이 넘는 한국인 근로자가 구금되면서, 국내 기업들은 미국 비자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미국 현지 투자와 공장 건설에 속도를 내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은 고객 미팅 등을 제외한 미국 출장을 전면 중단하고, 현재 출장자는 즉시 귀국 또는 숙소에 대기하도록 하는 임직원 지침을 내렸다. 또 이번에 단속을 당한 조지아 배터리 공장의 가동 시점을 기존 올해 하반기에서 2026년 상반기 이후로 잠정 연기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SDI, SK온 등 미국에 반도체,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기업들도 ‘제2의 현대차·LG’ 사태가 발생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에서 370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삼성SDI는 스텔란티스, GM과 손잡고 인디애나에 각각 20억 달러(2공장), 35억 달러 규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SK온은 테네시와 캔터키에서 114억 달러 규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에서 38억7천만 달러 규모 반도체 패키징 공장 착공을 앞두고 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비자 문제 대응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한 상태이니,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봐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의 미국 투자 심리가 크게 위축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 관세 협상, 한미 정상 간 협상을 통해 총 3500억 달러(약 486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김태형 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7일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에) 대부분 한국인이라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이번 미 당국의 한국인 체포는) 한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 계획 집행을 억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은 관행적으로 전자여행허가제(ESTA)나 B-1 비자를 활용해 국내 인력을 미국에 파견해왔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근로 활동을 하려면 전문직 취업(H-1B) 비자나 주재원(L1·E2)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지만 발급 요건이 까다롭고 기간도 수 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ESTA는 최대 90일, B-1 비자는 최대 6개월의 체류가 가능하지만 근로 활동은 금지된다.
미국 정부의 이번 불법체류자 단속은 현지 공장에 미국인 고용을 늘리라는 압박으로 관련 업계는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 반도체나 배터리 공장 건설이나 운영 경험을 갖춘 기술자를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관련 업계의 전언이다. 따라서 공장 건설과 초기 양산 단계에서는 핵심 기술이나 노하우를 전수할 국내 기술자 파견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들의 원활한 파견을 위한 비자 문제 해결을 요구해왔다고 업계 측은 설명했다.
우리 정부 측도 한국인 전용 E4 비자 요구 등을 미국 측에 요구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같은 사정은 비단 우리나라만은 아니다. 대만 TSMC도 미국 애리조나 반도체 공장 건설 과정에서 현지 인력 채용과 자국 기술자 비자 취득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TSMC는 현재 공장 가동 단계에서도 기술적으로 중요한 일은 대부분 대만에서 파견한 인력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역시 비자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2025년 8월25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연합뉴스> |
기업들은 정부가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이날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만나 “향후 미국 내 우리 국민의 안전과 기업의 원만한 경영 활동을 위해 재발 방지 대책 마련과 (H-1B 등) 비자 쿼터 확보 등 구조적 문제 해결에 민주당 대표님이 관심과 지원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산업통상자원부도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미 투자 기업들과 긴급 간담회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산업계는 전문직 취업비자(H-1B) 쿼터 확대나 한국인 전용 비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를 체결한 싱가포르와 칠레는 각각 연간 5400명, 칠레는 1400명이 쿼터에 따라 전문직 취업비자(H-1B)를 받고 있다. 특히 호주는 별도 법안으로 ‘E3’ 특별 비자 연 1만500개를 받고 있다.
한국인 특별 비자 신설 법안은 미국 의회에서 2013년부터 추진돼왔지만, 미국 의회 반대로 도입되지 않고 있다. 특별 비자 신설 법안은 연 1만5000개 규모의 한국인 특별 비자(E4)를 할당하는 내용의 법안인데, 미국 의회에서 10년 넘게 표류하고 있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미국 입장에서는 E4 비자가 늘어나는 것 자체가 자국 전문 기술인력이 취업할 수 있는 자리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회가 반대를 하는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도 미국의 일자리를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법안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전문 기술자를 위한 비자 확대를 놓고 협상 여지는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 인력이 부족해 공장 가동에 차질이 발생하는 것은 미국 제조업 부흥을 추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오현석 계명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에 비자 문제 해결이 시급해진 상황이지만, 미국으로부터 호주와 같은 특별 비자를 받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며 “하지만 미국도 한국 기업의 투자가 필요한 상황인 만큼, 정부가 세부적 투자 협상을 벌이면서 전문직 취업비자 확대 등 미국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비자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그는 미국 현지시각 7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우리는 당신(한국)이 훌륭한 기술적 재능을 지닌 똑똑한 인재를 합법적으로 데려와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길 권장한다”며 “우리는 그것(인재 데려오는 일)을 신속하고, 합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밝혔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