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한미 통상협상에서 '농업 개방'이 이재명 정부의 또 다른 고민거리로 급부상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25% 상호관세를 매기겠다고 통보한 시점이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은 쌀과 소고기 시장 개방을 요구하지만 국내 농민과 소비자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쌀은 지키고 소고기를 내주는 쪽으로 협상이 진행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한미 통상협의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17일 정부 움직임을 종합하면 이재명 정부는 미국의 관세 발효가 보름 정도 앞으로 다가오면서 한미 통상협상에 있어 총력전에 돌입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7일(현지시각) 8일 만료 예정이던 상호관세 유예 시한을 다음 달 1일까지 연장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똑같이 25%(기본관세 10%, 국가별 관세 15%)의 상호관세율을 책정했다. 17일 현재 보름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미국 정부는 일단 일본을 향한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각)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 바레인 왕세자(총리)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일본과는 서한대로 가게 될 것"고 말했다. 이번달 7일 일본 정부에 25%의 상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서한을 보냈는데, 실제 그대로 실행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각)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합동기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본은 (시장 개방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한국은 그것(시장 개방)을 할 수 있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했다. 한미 통상협상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과 달리 일부 시장을 개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거론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우리나라 통상 당국은 대미 협상에서 일부 농축산물 시장의 개방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모든 수출품에 25% 관세를 매기겠다는 '위협'에 자동차, 철강,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을 지키기 위해 농축산물 시장 개방을 협상 카드로 내밀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 제한 폐지 △감자 등 유전자변형작물(LMO) 수입 허용 △사과 등 과일 검역 완화 △쌀 시장 개방 확대 등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이들 품목은 과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도 거론됐던 '뜨거운 감자'였다.
특히 30개월 이상 소고기 문제는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촉발할 정도로 사회적 파장이 매우 컸다. 미국은 이번에도 소고기 시장 전면 개방과 더불어 검역 절차 간소화를 요구하고 있다.
실제 다른 나라들이 월령 제한 조치를 해제함에 따라 미국은 우리나라에 30개월 이상 소고기 시장 개방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연례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30개월령 제한을 '임시조치'로 규정하면서 이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미국전국소고기협회(NCBA)는 중국과 일본, 대만이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서 월령제한을 해제했다는 점을 들어 한국의 월령 제한도 개선해야 한다고 USTR에 요청한 바 있다.
현재 러시아·벨라루스 등 일부 국가가 여전히 월령 제한을 두고 있지만 이들 국가는 미국과 실질 교역이 거의 없다. 사실상 월령 제한을 고수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뿐인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에만 남은 월령 제한을 철폐할 경우 모든 주요 시장에서 미국산 소고기의 개방을 이뤘다는 정치적 성과와 무역 협상력을 과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쌀도 미국이 개방을 요구한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각)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일본은 대량의 쌀 부족을 겪고 있는데도 우리의 쌀을 수입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일본을 공개 압박했다. 한국도 예외가 되긴 어려워 보인다.
▲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9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 상무부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악수하며 기념 촬영하고 있다.
통상당국은 농업 시장 개방에 '일부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협상차 미국을 방문한 뒤 귀국한 1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농산물은 미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등 어떤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해도 고통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다"며 "저도 협상을 많이 해봤지만 모든 협상에서 농산물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적이 없고 그래도 산업 경쟁력은 강화됐다"고 말했다.
여 본부장은 이어 "농산물 부분도 우리가 지금은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며 "분명히 민감한, 지켜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런건 지키되 협상 전체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정부가 농축산물 규제 완화 문제를 한미 관세 협상에서 실질적 협상 카드로 검토하고 있음을 사실한 인정한 것이다.
다만 정부는 농업시장 개방을 두고 고심이 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전체 수출경쟁력을 고려할 경우 미국 측이 강하게 요구하는 쌀, 소고기 시장 개방이 합리적이지만 농민과 소비자의 커다란 저항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농민단체는 벌써부터 단체 행동에 돌입할 태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16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농업인의 동의 없이 농축산물 관세·비관세 장벽을 허문다면 절대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농업의 지속성 확보와 5천만 국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대대적인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한국농축산연합회도 이날 성명을 통해 "정부는 매번 농업 강국과 자유무역협정 체결 과정에서 농축산업을 상대국에 전면 양보했다"며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농축산물 추가 개방은 농민들에게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산업부가 농축산물 시장 개방 문제를 협상 카드로 검토한다는 소식에 즉각 해명에 나섰다.
농식품부는 16일 성명자료를 통해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제한 완화, 쌀 관세 철폐 등은 정부가 결정한 사항이 아니다"라며 "농식품부는 우리 농업의 민감성을 최대한 반영하고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신중히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국내 상황을 살펴볼 때 정부가 대미협상에서 쌀과 소고기 모두를 미국에 열어주기는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일각에서 나온다. 농민 반발이 거센 쌀 시장 쪽은 지키면서 소고기 시장을 내어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쌀은 국내 농업생산액 1위 품목으로 수입 물량을 확대할 경우 농민 피해가 크다. 농촌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
아울러 쌀 수입은 미국과 양자 협상만으로 조율할 수 없다.
쌀은 세계 무역기구(WTO) 협상에 따라 미국·태국·호주·베트남·중국 등 주요 쌀 수출국에 48만 톤의 의무 물량을 수입하고 이외 물량은 513%의 고관세를 적용하기로 합의돼 있다. 이에 양자 간 협상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종합해 이재명 정부는 조만간 '결단'을 내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스타일로 볼 때, 관세 유예 기간 안에 협상 타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주 내에 관계 부처와 집중적으로 협의해 랜딩존(합의점) 도달을 위한 협상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을 세워뒀다.
여 본부장이 조만간 다시 미국을 방문할 예정인 가운데 구윤철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김정관 산업부 장관 후보자 임명 후 동반 출국 및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의 재방미 등도 거론되고 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16일 언론 브리핑에서 "통상교섭 협상 과정은 국익을 최우선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라 상당히 변수도 많고 민감도가 높다"며 "국익을 최선으로 하는 방향 안에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통상교섭에 관해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