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한 후 40년 이상 꾸준히 흑자를 유지하는 기업은 국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적다.
이들 기업들은 긴 흑자의 역사를 바탕으로 삼아 사업다각화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흑자 경영을 더욱 탄탄하게 해주기도 하고, 한순간에 회사를 위기로 내몰기도 한다. 어떤 원칙이 이렇게 갈라놓았을까?
◆ 사업다각화 제 1원칙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원국희 신영증권 회장은 1971년 신영증권을 차렸다. 이후 43년 동안 흑자 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1997년 외환위기 때도 200억 원의 흑자를 달성했다. 가치투자의 대가로 불리는 워렌버핏마저 2007년 “신영증권을 포트폴리오에 담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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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열 신영증권 부사장(왼쪽) <출처=신영증권> |
원 회장은 평소 “시장점유율에 신경 쓰면 시황이 나쁠 때도 수익을 내기 위해 무리할 수 밖에 없다”며 “그러면 고객과 신뢰가 깨지기 쉽다”고 강조한다.
원 회장은 아무리 호황기일지라도 지점을 늘리지 않고 불경기에도 인력을 줄이지 않는다. 최근 다른 증권사들이 지점 통폐합을 하고 있지만 신영증권은 전국 25개 지점을 유지하고 있다.
원 회장도 사업을 막대하게 키울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외환위기 후 시장이 다시 활성화된 1999년이다. 다른 증권사들은 지점을 늘리고 온갖 광고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원 회장은 ‘절약정신’을 강조하면서 고객 서비스 개선에만 주력했다. 그는 당시 고객정보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원격백업센터’를 최초로 설치하고 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신영증권이 증권업계 불황에도 끄덕없이 흑자를 기록하는 이유는 다양한 수익구조에 있다. 박혜진 교보증권 애널리스트는 “업황에 관계없이 꾸준하게 실적을 내는 것이 신영증권의 최대 장점”이라며 “이는 브로커리지, 자산관리, IB(투자은행) 등 수익구조가 가장 다변화돼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신영증권에 다른 증권회사들처럼 ‘무모한 모험’에 나서는 문화가 없다. 고객에게 잘 모르는 상품은 추천하지도 않는다. 원종석 신영증권 사장은 “우리가 모시는 고객은 늘 한 발 앞서 있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는 요구만 잘 따라가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자사주를 매입해 회사에 대한 믿음을 보여줬다.
제약업계에도 55년째 ‘3무 경영’을 펼치는 대원제약이 있다. 3무 경영은 무적자 무차입 무정리해고를 뜻한다. 대원제약은 창업 이래 단 한번의 적자도 내지 않았다. 외환위기 때도 정리해고 한 번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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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열 대원제약 부회장 |
대원제약은 2002년 위기를 맞았다. 회사 매출의 30%를 차지하던 품목이 정부정책변화로 보험적용을 받지 못하게 됐다.
이를 경험한 뒤 중소제약사인데도 5년여 동안 100억 원을 투자하며 신약개발에 매달렸다. 이 덕분에 신약을 직접 개발하면서 100억 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새로운 수입원을 창출했다.
대원제약도 사업다각화를 하고 있다. 2011년에 국산 보청기업체 딜라이트를 인수했다.
오너2세로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백승열 대원제약 부회장은 “200만 원에 달하는 가격 때문에 난청환자의 보청기 사용률이 6%에 그쳐 시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 흑자경영의 위기 “경영의 본질을 잃다”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는 대한전선은 지난 6일 인수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투자안내서를 보냈다. 오는 11월경 인수절차가 마무리가 돼 새 주인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전선은 1955년 고 설경동 회장이 창업한 후 50여년 동안 흑자경영해왔다. 국내 최초의 전선 제조업체로서 그만큼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창업주에 이어 회사를 경영하던 설원량 회장이 2004년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지난해 오너3세인 설윤석 사장이 마침내 경영권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전선의 몰락에 무리한 사업다각화가 자리잡고 있다. 대한전선은 2005년부터 기존 사업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업다각화를 펼쳤다. 전선업 호황이 지속돼 막대한 자금이 쌓이자 이를 바탕으로 의류 레저 통신 건설 분야 등 이곳저곳 사업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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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윤석 전 대한전선 사장 |
대한전선은 전선 제조업과 동떨어진 미국 신약개발업체를 인수하고 골프장 등 부동산 개발사업에도 손을 댔다. 결국 대한전선은 2009년에 54년 동안 이어온 흑자신화를 지켜내지 못했다.
김범열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선도기업이 빠지기 쉬운 함정 가운데 하나가 수익을 탐내다 경영의 본질을 잃는 것”이라며 “기업이 생존을 위해 수익창출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수익창출 자체가 기업의 존재목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43년 동안 흑자경영을 해온 한일시멘트도 사업다각화에 실패한 결과 2012년 적자로 돌아섰다. 한일시멘트는 자회사인 한일건설 유상증자에 725억 원을 지원해야 했다. 그러나 건설경기가 악화돼 한일건설은 곧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말았다.
업계 관계자는 “전통적으로 부동산에 치우쳤던 회사들이 사업다각화에 실패한 사례가 많았다”며 “한일시멘트가 대표적 케이스”라고 말했다.
한일시멘트는 축산업에도 뛰어들었다. 자회사인 레미콘회사 한일산업이 별도법인을 만들어 대관령에서 축산업을 했는데 한일시멘트는 이곳에 수십억을 투자하기도 했다.
신용평가사 한 애널리스트는 “한일시멘트가 2008년까지 우수한 재무안정성을 유지했으나 여러 사업을 벌이는 바람에 부채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