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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
한진해운의 몰락은 우리나라 대기업이 안고 있는 ‘오너리스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2조 원에 이르는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게 됐다.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인수할 때부터 한진그룹 안팎에서 해운업황 회복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조 회장은 견제장치없이 그대로 밀어붙였다. 합리적 판단보다 해운업황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에 기반해 하늘과 땅과 바다의 물류 삼각편대를 구축하겠다는 '야심'이 더욱 컸다.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포기하면서 증권 전문가들이 "비로소 한진그룹 경영의 합리적 의사결정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하는 것도 같은 매락이다.
이런 오너리스크는 재계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조양호, 제동장치 없는 한진해운 인수
한진해운이 31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대한항공은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최대 3833억 원의 재무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조 회장은 2014년 4월 대한항공을 통해 한진해운을 인수했고 한진해운 대표이사 취임식에서 “3년 안에 정상화를 이끌겠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이 800%가 넘는 상황에서 대한항공이 자칫 승자의 저주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경제개혁연대는 “재무적 어려움에 처한 대한항공의 재무구조를 더욱 악화하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을 인수한 뒤 한진그룹 차원에서 2조 원에 이르는 자금을 한진해운에 쏟아부었지만 2년 반 만에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항공은 직접적 자금지원으로 손실을 본 것은 물론이고 주가와 신용등급이 일제히 하락하는 쓴맛을 봤다.
한진그룹 안팎에서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인수할 당시 우려하는 목소리는 컸다. 그러나 그 어떤 제동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오너의 '막연한' 의사결정에 모두 두려워하며 따라갈 뿐이었다.
조 회장은 당시 육해공 물류를 아우르는 종합물류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앞세웠고 해운업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전면에 내세웠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인수할 당시 구조조정을 마치고 해운업황이 좋아지면 그동안 누적됐던 적자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결국 안일한 상황인식에 따른 그릇된 판단이 한진그룹 전체에 부담을 안겼다”고 말했다.
대신증권은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에 대해 “한진해운에 대한 지원 리스크가 소멸되었다는 안도감을 넘어 한진그룹이 합리적 의사결정을 시작했다는 점이 사실상 가장 큰 투자 포인트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조 회장과 한진그룹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일침인 셈이다.
◆ 곳곳에 오너의 독단적 의사결정
오너의 견제장치 없는 의사결정이 그룹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은 사례는 곳곳에 존재한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과 강덕수 STX그룹 회장도 이런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 회장은 9월 시작되는 금호타이어 인수전에서 반드시 금호타이어를 되찾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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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
금호타이어 매각가는 최대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 회장은 지난해 금호산업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5천억 원 규모의 빚을 떠안은 만큼 또 1조 원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박 회장이 자금을 마련해 금호타이어 인수에 성공해도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 회장은 과거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한 뒤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박 회장은 2006년과 2008년 각각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하며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재계 7위까지 올려놓았다. 그러나 인수할 때 낸 빚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사실상 해체되는 위기를 겪었다.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은 결국 다시 팔렸고 알짜 계열사인 금호렌터카와 금호생명도 매각됐다. 동생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최근 화해하기까지 7년 동안 법정다툼을 벌였다. 금호석유화학과 완전히 남남이 됐다.
박 회장은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하기 전에 재계 5위 안에 들고 싶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박 회장은 당시 두 회사를 인수하는 게 무리라는 지적에 대해 “걱정 없다”고 일관했다.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도 독단적 의사결정으로 그룹이 공중분해됐다.
강 전 회장은 2001년 쌍용중공업을 인수해 STX그룹을 세웠다. STX그룹은 1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STX조선, STX에너지, STX팬오션을 차례로 인수하며 한때 재계순위 11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조선업과 해운업에 불황이 닥치자 재무구조가 취약한 STX그룹은 견디지 못하고 일순간에 무너졌다. STX그룹의 주력계열사였던 STX조선해양은 3년의 채권단 자율협약을 거쳤지만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강 전 회장은 성공신화에 도취돼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 우리 기업에 오너리스크 많은 이유
국내 대기업에 오너리스크가 큰 이유는 총수의 의사결정을 견제할 장치가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의사결정의 핵심인 이사회는 유명무실하다. 이사는 총수의 측근들로 채워지고 사외이사 역시 제역할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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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
한진해운 이사회는 조양호 회장과 석태수 한진해운 사장 등 사내이사 2명과 4명의 사외이사, 1명의 기타비상무이사 등 모두 7인으로 이뤄졌다. 기타비상무이사는 강영식 대한항공 부사장이 맡고 있다.
한진해운 사외이사는 공용표 전 대구지방국세청장, 이경호 인하대 교수, 정우영 변호사, 노형종 전 한국수출입은행 해외진출컨설팅센터장이다.
한진해운의 사업보고서 등에 따르면 2010년부터 올해 1분기까지 모두 174건의 의안이 한진해운 이사회에서 처리됐다. 6년 동안 55차례나 열린 이사회에서 반대의견을 낸 사외이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외이사들이 거수기 역할만 한 셈이다.
한 전문가는 “국내 대기업의 사외이사들이 감독과 견제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오히려 정부나 감독기관에 대한 로비 통로 혹은 외부비판에 대한 바람막이 역할을 수행한다”고 지적했다.
손꼽히는 기업이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면서 이사회가 제대로 열리지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현대차그룹은 2014년 한전부지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입찰가격 등과 관련해 이사회를 제대로 열지 않고 결정해 곤욕을 치렀다.
대기업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오너가 결정하면 이사회를 여는 것처럼 꾸며 막도장을 찍는 일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총수가 적은 지분으로 대다수의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잘못된 경영판단의 파급력이 매우 크다”며 “총수가 경영권 유지를 위해 친정체제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뚜렷한 점도 오너리스크가 큰 이유”라고 지적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