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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널리스트의 대부 '족집게' 심근섭

조은아 기자 euna@businesspost.co.kr 2014-07-25 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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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널리스트계의 대부.’ 심근섭 전 대우증권 전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는 1956년 3월 3일 한국 증권시장이 열린 이래 한국 애널리스트의 역사를 하나하나 직접 써내려갔다.

  애널리스트의 대부 '족집게' 심근섭  
▲ 애널리스트 대부 심근섭
국내에 애널리스트라는 직종을 사실상 처음으로 도입했고 지금 널리 쓰이는 용어들도 직접 번역했다.

정확한 분석과 예측은 심 전 전무에게 단순히 ‘첫 번째’가 아닌 ‘최고’라는 수식어도 함께 붙여줬다. 다른 증권사 직원들도 그의 리포트가 나오면 달달 외울 정도였다.

심 전 전무를 설명하는 또 다른 단어는 바로 ‘스승’이다. 한국 증권업계를 주무르는 전현직 리서치센터장 자리는 대부분 그의 제자들로 채워졌다. 그는 지금도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스승의 스승’으로 오르내린다.

은퇴 후에도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근도장을 찍으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70살이 넘은 나이에도 중국 관련 서적을 읽으며 중국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성공비결로 끊임없는 공부를 꼽았다.

심 전 전무는 ‘족집게’ ‘심 도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지만 정작 주식은 단 한 주도 산 적이 없다.

◆ 예리하고 날카로운 분석의 주역

1988년 10월 증권업계는 ‘상승대세가 끝났다’라는 대세종결론과 ‘상승이 계속된다’는 대세지속론으로 양분되어 논쟁을 벌였다.

심 전 전무는 당시 “증권시장의 대세상승은 이제 끝났다”며 “향후 2~3년 간 경기는 장기침체로 빠져들 것이며 주가도 하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증권업계는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중견 애널리스트가 던진 한마디의 파급력은 컸다. 그는 여전히 상승지속에 기대를 걸고 있던 대다수 투자자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투자자들의 비난과 낙관론자들의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심 전 전무는 뒷날 당시 상황에 대해 “회장님과 사장님이 피신하고 저는 처와 함께 황급히 집을 나갔다”며 “코스모스가 한창 필 때인데 죄 짓고 도망가는 두려움이 지금도 느껴진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심 전 전무의 예언은 4개월의 시차가 있었을 뿐 중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정확했다는 것이 뒷날 증명됐다.

심 전 전무는 1988년 이후에도 다시 한 번 예측에 성공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88년 지수가 반토막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종합주가지수가 1000을 돌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거의 예언 수준으로 황당하게 들렸던 까닭에 ‘미친놈’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증권시장은 그의 말을 적중으로 만들었다. 1994년 종합주가지수는 5년5개월 만에 다시 1000을 돌파했다.

심 전 전무가 처음 유명세를 탄 것은 1976년 대신증권 조사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당시 그는 4쪽짜리 주식관련 소식지 ‘주보’를 펴냈다. 노무라증권 조사부 자료와 이코노미스트, 뉴스위크 등 해외 경제잡지 등을 토대로 분석과 해설을 곁들였다. 주보는 그를 단숨에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훗날 주보에 대해 “재무부 관료들까지 챙겨 읽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경쟁 증권사는 주보가 나올 때까지 회의를 미룰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은퇴했지만 날카로운 분석력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2008년 우연찮게 은행 지점장실을 방문했는데 벽에 주요국 주가 그래프가 걸려 있었다”며 “딱 보니 삼봉패턴이 보이기에 한번 떨어지겠구나 했는데 금융위기가 왔다”고 말했다.

◆ 애널리스트의 기틀을 세우다

심 전 전무는 1940년에 태어나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다. 1963년 졸업과 동시에 돈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증권거래소에 입사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2막이 펼쳐졌다.

그는 증권거래소 입사초기를 회상하며 “증권파동 뒤끝이라 별로 할일도 없었던 터여서 헌책방을 뒤져 외국의 증시관련 책들을 읽곤 했다”고 말했다. 일본어 ‘이회(利廻·이찌마와리)’라는 단어를 ‘배당수익률’로 바꾼 것도 그였다. 그 때 그가 바꾼 말들은 증시의 기틀이 돼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1976년 대신증권에 입사했고 1981년 대우증권의 전신인 삼보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2년부터 회사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심 전 전무는 1997년 은퇴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업종별로 세분화된 애널리스트의 개념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그는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뒤 “앞으로 세분화, 전문화되지 않으면 시장분석이 어려워질 것 같다”며 직원들에게 담당업종을 지정해 줬다.

그는 업종을 맡은 사람은 직급에 관계없이 이름을 걸고 책임있게 연구하고 발표하도록 했다. 당시 후배들은 “한 분야만 아는 절름발이로 어떻게 살아남느냐”고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현재 애널리스트는 반도체 및 컴퓨터에서부터 채권까지 총 30개가 넘는 분야로 세분화돼 있다.

심 전 전무는 1997년 회사를 떠났다. 1995년 “몇 년 안에 종합주가지수가 2000에서 3000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크게 빗나갔기 때문이다. 문책성 인사로 자회사로 발령나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나왔다.

  애널리스트의 대부 '족집게' 심근섭  
▲ 심근섭 전 대우증권 전무가 지난 2011년 방송에 출연했다.

◆ 증권업의 ‘절대 카리스마’

심 전 전무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스승이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 남아있는 후배들은 “우리는 심 전 전무를 직장상사라기보다 스승으로 생각했다”며 “뛰어난 분석과 예측, 성실함은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지금도 심 전 전무의 제자들은 스승의 날 그를 찾아간다. 1940년 생으로 올해 나이 75세인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60대의 후배들도 가끔 야단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증권업계에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애널리스트 특유의 도제식 수습방식도 만들었다. 그는 가능성이 보이는 신참들에게 선배를 1대 1로 붙여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선배인 사수가 후배인 부사수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방식이다.

전병서, 신성호, 이종우 등 전현직 리서치센터장들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지금의 젊은 애널리스트들에게 ‘스승의 스승’인 셈이다. ‘심근섭 학파’, ‘심스 스쿨’이라는 말도 생겼다. 한때 주요 증권사 리서치센터장 절반 이상이 심근섭 학파로 채워진 적도 있었다.

심 전 전무는 후배들에게 엄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증권업계에서 대우증권 리서치센터는 ‘리서치 사관학교’라고 불릴 만큼 혹독한 교육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는 그 출발로 심 전 전무의 무자비한 교육방식을 꼽는다.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을 지낸 전병서 경희대 중국경영학과 교수는 심 전 전무에 대해 “나이 30줄에 볼펜으로 머리를 맞아가며 배웠다”며 “그래도 당대 최고의 대가에게 배우는 게 영광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신성호 우리투자증권 본부장은 “당시 그 분 밑에서 일했을 때 야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추석이나 설날조차도 당일 이외에 쉬지 못할 정도로 정말 빡빡한 근무의 연속이었다”며 “집에 들어가는 것은 그저 와이셔츠를 갈아입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종우 아이엠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거의 사람을 잡아 삼킬 듯한 분위기 속에서 가르쳤다”고 기억했다.

◆ 학구열에 불타는 딸깍발이

심 전 전무는 꼬장꼬장하고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에게 ‘딸깍발이’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신성호 우리투자증권 본부장은 심 전 전무의 분석 때문에 고생했던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주변의 눈치 안보고 소신껏 보고서를 내는 심 전 전무 때문에 협박전화를 많이 받았다”며 “여비서들이 전화 때문에 많이 울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1997년 은퇴한 후에도 서울시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 한동안 출근도장을 찍었다. 경제와 증권 분야가 아닌 역사와 사회를 공부했다. 그는 "왜 경제공부가 아닌 다른 분야를 공부하냐"는 질문에 “투자를 알기 위해서 경제를 알아야 하고 경제를 알기 위해서 역사와 사회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날카롭고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었던 비결로 끊임없는 공부를 꼽았다. 증권거래소 입사 직후 모든 증권제도가 새로 도입되는 단계이었던 만큼 그는 외국자료를 탐독했다.

그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오랫동안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며 “그러기 위해서 본인도 본인이지만 회사도 전문가를 키울 수 있도록 제도를 잘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70세가 훌쩍 넘는 나이에도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것처럼 머지않아 중국이 한국을 추월한다”며 “중국어 공부도 안 하고 중국의 최신자료 대신 때늦은 영미자료를 들여다보면서 정책을 세우고 사업을 한다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애널리스트를 준비하는 후배에게도 “중국어를 영어 못지않게 익혀 놓으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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