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2012년 국내 유통가의 화두는 재벌가 딸들의 빵집 사업 진출이었다.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운 사업으로 골목상권을 손쉽게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고 정부 차원에서도 개입했다. 결국 재벌들이 빵집에서 줄줄이 철수를 선언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재벌들의 자녀들이 외식 브랜드로 손쉽게 사업 확장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한동안 이어졌다. 사진은 2022년 1월 초 아티제 한 매장.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역사는 반복된다.
10여 년 전. ‘재벌가 딸들의 빵집’이 유통가를 뜨겁게 달궜다.
당시 여러 재벌그룹은 경쟁적으로 베이커리 사업에 진출하고 있었다.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 롯데그룹, 신세계그룹 등 굴지의 재벌가 3세 딸들이 주도하는 사업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오너 경영인의 ‘신사업’인 셈이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아티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의 딸인
정성이 이노션 고문의 ‘오젠’,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외손녀인 장선윤씨의 ‘포숑’,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딸인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의 ‘달로와요’ ‘베키아에누보’ 등 각 재벌가 딸들은 저마다의 브랜드를 키워나갔다.
하지만 이들의 빵집 진출은 곧 여론의 뭇매를 맞기 시작했다. 재벌가 딸들이 골목상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진 것이다. 2003년 1만8천 개 수준이던 영세 자영업자들의 빵집 수가 7년 만에 4분의 1 수준까지 줄었다는 사실은 세간의 시선을 차갑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국회 차원에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대정부 질문에서 재벌가 2세와 3세들이 빵집 사업에까지 진출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공정거래위원회가 직접 나서 2011년 11월 삼성그룹과 롯데그룹, 신세계그룹 등 재벌가 딸들이 만든 제과업체를 대상으로 부당지원행위 여부를 살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입장 변화를 보이지 않던 재벌들이 태도를 180도 바꾼 계기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2012년 1월25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재벌 2·3세 본인들은 취미로 할지 모르겠지만 빵집을 하는 입장에선 생존이 걸린 문제다”라며 “(2·3세들이) 중소기업 업종을 한다고 해도 그런데 소상공인 업종까지 하느냐”고 말했다.
흉년이 들 때면 부자 만석꾼들은 소작농들의 땅을 사서 넓혔지만 300년 부자로 유명한 경주 최씨 가문은 흉년에는 어떤 경우에도 땅을 사지 말라는 가훈을 지켜 존경받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재벌 2·3세의 행태가 비윤리적이라고까지 했다.
사실상 재벌들에게 사업에서 손을 떼라는 신호를 준 것이다.
이 발언이 나온 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곳은 호텔신라였다. 곧 사업을 매각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3달 만에 대한제분에 아티제 지분을 넘겼다. 현대차그룹도 사업에서 철수했으며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 등도 회사를 매각하거나 오너일가의 지분을 소각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현재 유통가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11년 전 재벌가 딸들이 빵집에 진출하던 초기 모습이 얼핏 겹쳐 보인다. 그때 문제가 ‘재벌가 딸들의 빵집’이었다면 현재 화제는 주어와 업종만 바뀐 ‘재벌가 아들들의 햄버거집’이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가장 주목받는 햄버거집을 꼽으라면 단연 ‘파이브가이즈’다. 파이브가이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전략본부장이 직접 국내 도입을 이끌었다.
2016년 7월 국내에 들어온 햄버거 프랜차이즈 쉐이크쉑도 재벌이 운영하는 햄버거집이다.
허영인 SPC그룹의 둘째 아들인
허희수 부사장이 쉐이크쉑의 국내 도입을 주도했다.
쉐이크쉑과 파이브가이즈의 공통점은 모두 재벌가 아들들이 의욕을 보이는 새 사업이라는 점이다.
▲ 현재 국내 프리미엄 버거 시장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모두 재벌가의 아들들이다. 파이브가이즈의 국내 도입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전략본부장(왼쪽)이 주도했으며 쉐이크쉑의 국내 도입은 허영인 SPC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 허희수 부사장이 추진했다. |
김동선 본부장은 오랜 기간 한화그룹 밖에서 돌다가 2021년 하반기에야 그룹 경영에 복귀했는데 좀처럼 외부 행보를 하지 않다가 파이브가이즈 론칭을 앞두고 경영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직접 홍콩 파이브가이즈 매장을 방문해 조리과정을 포함한 제조 과정 전반을 실습하기도 했으며 국내 1호점 매장 오픈 기념행사에도 직접 참석해 “브랜드의 오리지널리티를 선보이겠다”고 자신했다.
허희수 부사장도 마찬가지다. 허 부사장은 쉐이크쉑의 성공적 안착을 계기로 이후 글로벌 유명 외식 프랜차이즈 에그슬럿 등을 국내에 추가로 선보였다.
미국 3대 버거 가운데 2곳이나 한국에 진출하면서 나머지 1곳인 인앤아웃의 국내 론칭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이를 두고도 재벌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과거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미국 출장길에 인앤아웃 버거를 먹었다는 사실을 인증한 바 있는데 이를 놓고 신세계그룹이 인앤아웃의 국내 도입을 주도하지 않겠냐는 얘기가 나온다.
여기까지만 보면 11년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물을 수도 있다. 아직은 재벌가 아들들의 햄버거사업 진출을 나무라는 사람도, 이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재벌가 딸들의 빵집’을 놓고 나왔던 논의들을 살펴볼 때 ‘재벌가 아들들의 햄버거집’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재벌이라고 해서 글로벌 유명 브랜드를 한국에 유치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대기업이라는 말 자체가 신뢰를 뜻하니 외국 기업 입장에서도 사업 파트너로 믿고 맡기기 편할 수 있다.
하지만 재벌들이 한가하게 햄버거 브랜드나 들여올 때냐는 부정적 인식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재벌들의 빵집 진출을 비판하며 “수조 원이나 버는 회사들이 그런거 하면 되겠느냐”고 비판했다고 한다.
재벌에게는 ‘기업시민’에 걸맞은 역할과 책임이 존재한다. 내수를 바탕으로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들이 세계라는 큰 무대로 나가기보다 골목상권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 수 있는 사업에 나서는 것은 결코 기업시민의 자세가 아니라고 믿는다.
사실 재벌 2·3세들에게 창업주만한 기업가 정신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창업보다는 수성이 어렵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좀 더 창의적이고 ‘재벌답다’라는 말을 듣는 사업에 진출하는 소식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앞으로는 국내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사업 아이템을 앞세워 당당하게 해외 진출을 꿈꾸는 재벌들의 재벌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