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정권 초기인 만큼 국민연금이 주인 없는 회사의 인사에 개입하려 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1월2일 전북 전주시 국민연금공단 본부에서 열린 '2023년 시무식 행사'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국민연금공단>
1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공단이 구현모 KT 대표이사 사장 연임에 반대하는 등 최근 스튜어드십코드 강화 기조를 보이고 있다.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은 지난달 8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KT, 포스코, 금융지주 등 소유가 분산된 기업의 책임투자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도 취임 첫 날인 12월27일 "소유 분산 기업들이 CEO 선임을 객관적 합리적이고 투명한 기준에 따라 해야 셀프연임, 황제연임 우려가 해소되고 주주가치에 부합한다"고 말하며 김태현 이사장을 거들었다.
일반적으로 국민연금의 최고경영자(CEO)인 이사장이 정치적 요소를 고려해 가치판단을 내린다면 최고투자책임자(CIO)인 기금운용본부장은 수익률에 무게를 둔 의사결정을 주로 한다. 이사장과 기금운용본부장의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구현모 사장의 연임을 놓고 김태현 이사장과 서원주 본부장이 같은 목소리는 낸 것이다.
구현모 사장이 3년 동안 대표이사로 재임하는 동안 KT 주가는 높은 실적을 바탕으로 2배 가까이 상승했고 주당 배당금도 2019년 1100원에서 2021년 1910원으로 꾸준히 인상됐다. 수익률을 우선 고려해야 할 서원주 본부장으로선 '잘 나가는' KT의 지배구조에 굳이 손 댈 이유가 적은 데도 KT가 차기 주주총회에 추천할 최종 후보를 결정하기 전날 KT를 압박한 모양새가 됐다.
국민연금공단은 KT 지분 9.99%를 보유해 KT의 최대주주다. 국민연금이 구현모 사장 연임에 사실상 반대의사를 표명한 상황에서 KT의 차기 대표이사 후보로 구현모 사장이 내정된 만큼 3월 열리는 KT 주주총회 표대결이 주목된다.
2019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로 고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한 적이 있다. 구현모 사장이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로 경영권을 잃는 두 번째 사례가 될지가 주요 관심사다.
국민연금 2대 주주와 3대 주주인 현대자동차그룹(7.79%)과 신한은행(5.58%)은 KT의 우호지분으로 분류된다. 국민연금 지분이 이들 지분을 합친 것보다는 적지만 이들 역시 국민연금을 최대주주로 두고 있어 마음을 돌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스튜어드십코드란 수탁자 책임 정책의 일환으로 투자자가 피투자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지침이다.
주주가치 제고 측면에서 국민연금공단의 스튜어드십코드 강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스튜어드십코드 행사로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한다면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를 높여 국민연금공단의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서원주 본부장도 "CEO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며 지배구조를 문제삼고 있다.
저출생·고령화로 연금 보험료를 내는 경제활동인구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연금공단이 기금을 운용해 충분한 수익을 내지 않으면 연기금 고갈이 더욱 빨라질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다.
윤석열 정부가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연금개혁에 반발하는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국민연금공단은 기금운용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주식시장 불황으로 국민연금 운용 수익률도 최근 부진하다. 2022년 3분기 국민연금의 누적 수익률은 -7.06%다. 국내주식 수익률만 보면 -25.47%로 크게 부진했다.
김태현 이사장은 신년사에서 "연금개혁과 관련된 홍보와 긍정적 여론형성에 힘써 사회적 합의를 통해 연금개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데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일각에선 수익률 증대나 주주가치 제고는 명분이고 실제론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국민연금공단을 통해 공기업에서 출발한 기업에 반영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나온다.
KT는 구현모 사장 이전까지 주로 친정부 성향의 외부인사들이 대표를 역임했다. 이에 내부 인사 출신으로 전임 정부 시절 최고경영자에 오른 구 사장이 연임하는 것을 현 정부로선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공단이 여러 기업에 투자하고 있지만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려는 곳은 공기업이었던 KT나 포스코 등에 집중된 것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여당에서 국민연금공단과 결을 같이 하는 목소리를 내며 거드는 모습도 나타난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은 10일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인 신년인사회에서 "KT 이사회가 대표를 선임하는 그 과정이 좀 불투명하다"며 "혹시나 옛날처럼 '알박기'식 인사가 있을 수 있으니 그런 것도 좀 투명하게 잘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남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