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27일 열린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국가 바이오 파운드리' 구축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윤석열> |
[비즈니스포스트] “우리나라는 바이오시장 점유율이 2% 정도밖에 안 되는데 향후 10년 안에 약 두 자릿수로 높이겠다. 이를 위해 백신·신약을 신속 설계하고 생산할 수 있는 ‘국가 바이오 파운드리’를 구축하겠다.”
27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이같은 포부를 드러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바이오기업에 대한 투자 열기가 뜨거웠던 한국에서도 바이오 파운드리라는 용어는 낯설다. 하지만 해외 국가와 기업들은 이미 바이오 파운드리에 활발한 투자를 펼치고 있다.
이 장관이 한국 바이오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신무기로 꺼내든 바이오 파운드리는 대체 무엇이고 왜 필요한 걸까.
◆ 바이오 파운드리, 신속 정확한 연구개발에 필수
과기정통부 등 정부 부처의 설명을 종합하면 바이오 파운드리는 인공지능(AI), 로봇 등을 바이오 연구에 결합해 실험 전 과정을 고속화하기 위한 자동화 장비 및 이를 운영하기 위한 디지털 시스템을 의미한다.
연구개발의 특정 절차에서만 기계를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총체적 자동화가 가능한 체계를 구축해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후보물질을 합성하는 중요한 업무부터 시험관이나 샬레를 나르는 사소한 작업까지 하나로 연결되는 식이다.
지금까지 사람이 주도적으로 수행하던 연구개발을 굳이 인공지능이나 기계에 맡겨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빠른 연구, 더 정확한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바이오 파운드리가 연구개발과 생산을 하는 규모가 사람이 주도하는 것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본다. 바이오 파운드리의 작업 과정은 설계(Design), 제조(Build), 시험(Test), 학습(Learn) 등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런 과정을 빠르게 반복하면 능률이 점점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오태광 서울대 특임교수는 지난해 11월 국가미래연구원 기고문에서 “바이오 파운드리를 이용하면 최적의 생산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자동화된 시설로 24시간 쉬지 않고 DBTL(설계-제조-시험-학습)을 반복할 수 있다”며 “설계부터 학습까지 진행하면서 얻은 모든 자료가 컴퓨터에 기억돼 유사한 공정을 개발할 때 활용되거나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독창적 기술진화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휴먼 에러’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도 바이오 파운드리의 주된 장점이다.
복잡한 단백질과 유전자를 다뤄야 하는 바이오 분야 연구에서는 아무리 미세한 오차라도 실패를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바이오 파운드리를 통해 연구개발을 진행하면 정밀한 조작이 필요한 생물학적 연구를 기계적으로 수행해 오차를 최대한 줄이는 게 가능하다.
▲ 바이오 파운드리 개념. 바이오 소재 및 의약품 개발과정의 정확도를 높이고 소요 시간과 비용을 줄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
◆ 해외 바이오 파운드리는 이미 궤도에 올랐다
그렇다면 바이오 파운드리로 성과를 낸 사례는 얼마나 있을까.
해외에서는 바이오 파운드리가 일찌감치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미국 기업들의 성과가 돋보인다.
미국 징코바이오웍스(Ginkgo Bioworks)는 바이오 파운드리 기술을 기반으로 맞춤형 균주 개량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보다 5~20배 빠른 연구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기술력은 특히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백신 제조공정을 최적화하고 진단 속도를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다양한 바이오 원료를 제조하는 미국 아미리스(Amyris)도 바이오 파운드리 분야를 선도하는 기업 중 한 곳이다. 아미리스는 1주에 균주 1600종 제작, 시료분석 10만 건이 가능한 바이오 파운드리를 도입해 7년 동안 신약과 소재 15개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정부도 바이오 파운드리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 산하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자체적으로 바이오 파운드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자동화와 기계학습(머신러닝)을 결합한 최첨단 시설을 활용해 정밀한 제조공정을 테스트한다.
영국에서는 정부와 대학 등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조성된 공공 바이오 파운드리가 활성화되어 있다. 에딘버러대학, 리버풀대학, 맨체스터대학, 임페리얼칼리지, 얼햄연구소 등이 각각 바이오 파운드리 거점을 구축해 산업계과 발을 맞추는 중이다.
이밖에 독일, 중국, 일본 등 다른 해외 국가도 바이오 파운드리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미국과 영국에 이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고 있으며 관련 특허 출원도 최근 활발한 것으로 파악된다.
반면 국내 바이오 파운드리는
이종호 장관이 새삼 바이오 파운드리를 구축하겠다고 말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다. 카이스트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성균관대를 비롯한 학계와 연구기관이 주도하는 개발의 비중이 크다.
카이스트·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올해 7월 바이오 파운드리 구축 협약을 맺고 핵심기술 확보, 기술 수요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공 인프라 구축 등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성균관대의 경우 2020년 초 바이오 파운드리 연구센터를 설립해 신소재 개발, 국제 공동연구 등을 추진하고 있다.
민간기업 중에서는 CJ제일제당이 바이오 파운드리를 적용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CJ제일제당은 균주 개발과 생산공정 자동화를 위해 바이오 파운드리 시설을 도입했다.
이대희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3월 한생연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바이오 파운드리를 구축해 합성생물학 발전을 가속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며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바이오 파운드리 구축이 매우 미진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가 구축한 바이오 파운드리. < NIST > |
◆ ‘정부가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근거가 숙제
“기업이 해야지, 정부가 해서 효과가 있겠어요?”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이종호 장관이 ‘국가 바이오 파운드리’를 소개하자
윤석열 대통령이 한 질문이다.
통상 첨단 기술의 발전이 기업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윤 대통령의 지적처럼 정부가 주도하는 바이오 파운드리 투자는 효율성이 낮다는 우려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에서는 바이오 파운드리의 도입을 민간에만 맡겨둬선 안 된다는 시각이 우세해지고 있다. 바이오 파운드리가 단순히 바이오의약품뿐 아니라 생활 소재, 에너지, 화학 등 총체적 바이오 분야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술인 만큼 정부가 나서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림식품기술기획평가원은 올해 1월 보고서를 통해 “바이오 파운드리 구축을 통한 바이오 연구의 고속화·대량화·저비용화 실현으로 환경, 에너지, 질병, 농업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 지속가능한 산업적 가치 구현이 가능하다”며 “바이오 파운드리는 산업뿐만 아니라 환경 안보 등의 차원에서도 중요도가 높아짐에 따라 국가 기술경쟁의 핵심으로 대두했다”고 분석했다.
이에 정부는 2024년까지 국가 바이오 파운드리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완료하고 구축에 나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정부 주도 바이오 파운드리사업은 이미 한 번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좌초한 경험이 있어 실제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과기정통부와 산업부 주관으로 추진된 7400억 원 규모 ‘바이오 파운드리 구축 및 활용기술개발사업’ 얘기다.
당시 정부는 공공 바이오 파운드리 인프라를 구축해 바이오 연구개발 속도 5배 향상, 월 균주제작 성능 500건, 연간 바이오 파운드리 활용 50건 등 전체 바이오부품 1만 건 발굴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예비타당성 조사를 했다.
그런데 조사를 수행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은 이 사업의 비용편익을 0.30으로 평가했다. 투자한 비용이 10이라면 나오는 이익은 3에 그쳐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는 주관 부처가 제시한 비용편익 1.21보다 훨씬 낮았다.
정부 부처가 세운 목표와 바이오 파운드리 수요 등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게 낮은 비용편익의 원인이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은 “2020년 사업기획 초기에 실시한 인식조사에서 기업 응답자의 57.4%, 바이오 연구자의 37%가 바이오 파운드리를 모른다고 응답했다”며 “국내 바이오 관련 기업의 바이오 파운드리 서비스 수요, 합성생물학 분야 연구 수요 등의 분석이 미흡하고 인프라 구축 규모 및 계획을 수요에 기반해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전략적인 필요성과 별개로 실제 경제적 이득이 있는지를 설득하는 것이 앞으로 국가 바이오 파운드리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열쇠인 셈이다.
이 장관은 국가 바이오 파운드리의 효용을 묻는 윤 대통령에게 “국가에서 마중물로 하고 기업이 적극 참여하는 형태로 유도하겠다”고 답했다.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