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참사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일어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작년 사고 뒤 이사회나 경영진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에 관해 제대로 보고해주기 바란다.”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HDC현대산업개발 주주총회에 참여한 한 주주는 이렇게 경영진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 권순호 HDC현대산업개발 고문이 29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주주총회의 의장을 맡아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날 주총에서는 HDC현대산업개발이 연이은 대형 참사에도 내부적으로 책임을 묻고 조치가 없다는 질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총에는 주주 125명 참석했다. 평소보다 4~6배 정도 많은 수준이라고 한다.
◆ "재판 진행 중이라 내부적 책임 묻지 않는다는 말은 굉장히 비겁하다"
HDC현대산업개발 소액주주의 의결권을 위임받아 참석한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사고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을 다 재선임하는 안건이 올라오면 현대산업개발이 경영쇄신을 하고 인적쇄신을 한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관계자는 이어 “감사보고가 적절하게 진행됐다고만 간단하게 말하고 있는데 사고 뒤 내부 책임자에 관한 조사 및 징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다른 주주도 “회사가 광주에서 발생한 참사에 여러 번 사과했지만 그럼에도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며 “정몽규 회장이 퇴진하면서 쇄신을 말했지만 이번 주총 안건을 살펴보면 여전히 안전과 품질 담당 책임자도 독립적이고 객관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주총 안건에서부터 회사의 쇄신 의지가 미흡한 것이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고영호 HDC현대산업개발 미래혁신본부장 전무는 사고 뒤 내부에서 조사와 징계 조치가 이뤄졌는지를 묻는 질문에 “광주 사고 뒤 안전경영실을 중심으로 대책을 논의했고 정몽규 회장이 1차적으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며 “사고에 관한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와야 회사가 사고원인과 책임소재에 관한 부분을 발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변했다.
이날 의장을 맡아 주총을 진행한 권순호 전 대표(현 고문)도 “아직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 지금 징계를 잘못하면 수사와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이 부분이 마무리되면 내부적으로도 책임에 관한 문제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는 HDC현대산업개발이 광주 학동 및 광주 화정아이파크 아파트 붕괴사고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아직 책임을 묻지 않고 있음을 확인해 준 셈이다.
특히 내부감사조차 별도로 진행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권 의장은 “내부감사를 논의는 했지만 감사가 진행되려면 사고 원인이 정확히 나와야 하는데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라 감사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주주는 내부감사 진행여부에 관한 질문을 하면서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아직 내부 임직원 책임 여부를 논의하기 어렵다는 답변은 굉장히 비겁하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내부감사가 없으면 주주들이 어떻게 회사를 믿을 수 있겠느냐”며 “조직개편 말고 실제 현장을 어떻게 감독하고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관해 답변해달라”고 경영진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HDC현대산업개발은 원론적 답변밖에 내놓지 못했다.
◆ 최고안전책임자 활동의 실효성에 우려 나와
화정아이파크 아파트 사고 뒤 최고안전책임자(CSO)로 영입된 정익희 부사장이 나서 CSO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지 밝혔다. 하지만 이는 이미 공개된 안전사고 재발방지 대책을 설명하는 수준에 그쳤다.
권 의장은 “왜 두 건의 사고가 같은 지역에서 반복됐는지 처절하게 원인을 찾고 있다”며 “회사 직원들도 침울하고 죄송하고 고개를 못 들고 다니고 있다. 주주들에 죄송하다”고 말했다.
권 의장은 이어 최고안전책임자를 사외이사가 아닌 사내이사로 둔 것을 놓고 “상근하는 사내이사가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안전과 품질부문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이 CSO 조직을 기존 경영부문과 완전히 분리해 독자적 권한을 준 점도 강조했다.
다만 여전히 기업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내부 경영자가 비용절감 등을 놓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안전과 품질 관리 부문까지 책임지면 이해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에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이날 주총에서 HDC현대산업개발의 상정 안건들은 회사가 애초 수용하지 않았던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관한 권고적 주주제안 신설 안건을 제외하고 모두 원안대로 가결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는 HDC현대산업개발의 내부 쇄신 의지에 관한 의구심과 질책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형식적으로는 광주 사고 뒤 첫 주총이라는 큰 벽을 넘은 셈이지만 실질적으로 주주와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어보인다.
▲ HDC현대산업개발 직원들이 29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HDC현대산업개발 주주총회에서 제2호 의안 이사선임 안건 투표가 끝나자 개표작업을 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날 주총에서는 주주들의 요청으로 유병규 HDC현대산업개발 신임 대표이사 사장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 권인소 사외이사 재선임 안건 등이 그대로 의결되지 않고 투표에 부쳐졌다.
이사선임 안건은 주주들의 경영진에 대한 신임을 묻는 안건이기 때문에 표결로 진행해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는 건의에 따른 것이다.
소액주주 대리인으로 참석한 참여연대 활동가는 “주주들이 책임 있는 이사들에 관해 하나도 부결하지 않고 넘어가면 무슨 자구책이 있을 것인가”라며 “시간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쇄신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주들에 호소했다.
정익희 부사장 사내이사 선임 안건은 몇몇 주주들 사이에서 투표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투표에 부치지 않고 의결절차로 넘어갔다.
하지만 권 의장이 정익희 부사장 선임 안건에 이어 권인소 사외이사 재선임 안건도 투표를 해도 많이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며 투표 진행 없이 기록만 남기고 의결하는 방안을 또 제시하자 분위기가 격앙됐다.
참여연대 활동가는 “삼성전자 주주총회 13시간 한 적도 있다”며 “지금 2시간밖에 안 지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개인주주도 “의견이 나왔으면 맞게 좀 진행해 달라”라며 “의장님한테는 여기서 한 시간이 낭비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주주는 의장님 같은 임원분 만날 일이 별로 없다”고 쏘아붙였다.
이날 주총 제4호 의안인 정관일부변경 승인 안건에서도 회사의 혁신 의지에 관한 불신을 엿볼 수 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앞서 네덜란드 연금투자회사 APG의 정관변경 주주제안 가운데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관한 권고적 주주제안 신설 안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APG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이날 회사 대표로 참석해 주주제안의 배경을 직접 주주들에게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사고 뒤 대부분의 지배주주가 있는 기업들이 그렇듯 현대산업개발도 지배주주가 고개 한번 숙이고 책임에 통감한다고 말 한 번 하고 이런 너무나 전형적 태도를 보였다”며 “사외이사가 이사회에서 차지하는 존재감도 없는 것에 가까워 견제와 감시 역할이 거의 안 된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이 앞으로 광주 사고로 사회에 끼친 해악, 기업가치를 하락시킨 부분 등을 제대로 성찰하고 회복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주주제안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날 주총에서는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결산배당으로 받게 될 배당금과 HDC현대산업개발 대표에서 퇴진하면서 받을 퇴직금을 반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직원들은 이탈하고 조직이 망해가고 있는데 정몽규 회장이 몇 백억의 몫을 챙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HDC현대산업개발은 광주 화정아이파크 아파트 붕괴사고 손실추정액 1754억 원 외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사고에 따른 보상금 등으로 약 100억 원의 손실이 생겼다.
이날 HDC현대산업개발 주총은 오전 10시쯤 시작해 광주 사고와 관한 질책과 성토가 이어지면서 3시간가량이 지난 오후 1시10분 여가 돼어서야 끝났다.
주총에는 유병규 HDC현대산업개발 신임 대표이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권순호 전 대표가 의장을 맡아 주총을 진행했고 정익희 최고안전책임자 부사장과 회계, 법무, 경영부문 임원들이 참석해 주주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박혜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