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케미칼이 사상 처음으로 롯데쇼핑을 매출에서 앞질렀다.
롯데그룹의 중심으로 평가받던 유통사업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신동빈 회장이 경영수업을 받았고 인수합병으로 힘을 실어 키워온 롯데케미칼의 위상 확대는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 롯데케미칼, 창사 이래 최초로 매출에서 롯데쇼핑 제쳐
9일 롯데쇼핑과 롯데케미칼의 실적을 비교해보면 두 회사의 매출 순위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뒤바뀌었다.
롯데케미칼이 잠정집계해 발표한 2021년 연결기준 매출은 17조8052억 원이다. 반면 롯데쇼핑은 2021년에 연결기준으로 매출 15조5812억 원을 낸 것으로 파악됐다.
롯데케미칼이 매출에서 롯데쇼핑을 제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롯데케미칼이 롯데그룹의 확실한 현금 창출원(캐시카우)으로 자리잡은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롯데케미칼은 2015년 이후 항상 롯데쇼핑보다 많은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매출에서는 롯데쇼핑을 앞서지 못했다.
롯데케미칼이 롯데쇼핑의 매출을 앞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롯데쇼핑의 부진 탓이 크다.
롯데쇼핑은 2011년부터 2016년까지 해마다 매출 22조 원 이상을 냈다. 사상 최대 매출을 냈던 2015년에는 매출이 30조 원에 육박하기도 했다.
반면 롯데케미칼은 해마다 매출 15조 원 안팎을 내는데 그쳤다. 롯데케미칼이 롯데쇼핑의 매출을 따라잡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롯데쇼핑의 매출이 2015년 정점을 찍은 뒤로 꾸준히 하락세를 보이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롯데쇼핑은 2016년에는 중국의 사드보복에 따라 중국사업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도 불매운동, 코로나19에 따른 오프라인 매장 타격 등 외부 악재에 잇따라 노출되면서 매출이 쪼그라들었다. 롯데쇼핑이 지난해 낸 매출은 2015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롯데케미칼에도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롯데케미칼의 매출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2015년과 2016년에는 각각 영업이익률 19.2%, 18.5%를 기록하며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연달아 갈아치웠다.
그러나 점차 수익성이 악화하기 시작해 2020년에는 매출 12조2230억 원, 영업이익 3591억 원을 거두는 데 그쳤다. 매출은 2015년 이후 5년 만에, 영업이익은 2014년 이후 6년 만에 최저였다.
하지만 롯데케미칼은 코로나19에 따른 포장재 및 의료·방역용품 사용 확대, 전기와 전자, 자동차 등 전방 산업의 수요 증가와 제품 스프레드(제품 가격에서 원재료 가격을 뺀 것) 개선에 힘입어 1년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 사상 최대 실적은 덤으로 얻었다.
◆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의 달라진 처지, 신동빈의 애정 담긴 화학사업
롯데쇼핑과 롯데케미칼의 매출 순위 뒤바뀜은 롯데그룹 내에서 두 회사의 달라진 입지를 보여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롯데쇼핑은 자타공인 롯데그룹의 중추다.
롯데그룹 최초로 탄생한 전문경영인 출신 부회장이 롯데쇼핑 대표이사를 역임했던 이인원 부회장이었다는 사실은 롯데그룹에서 롯데쇼핑이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하지만 롯데쇼핑을 둘러썬 대내외 악재가 계속되면서 입지는 점차 줄었다.
롯데쇼핑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벌어들인 영업이익은 3조2922억 원인데 이는 롯데케미칼이 같은 기간 벌어들인 영업이익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신동빈 회장이 유통사업을 덜 챙기는 것은 아니다. 신 회장은 유통 계열사들에 여전히 많은 애정을 가지고 부활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롯데쇼핑의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해 김상현 부회장,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 강성현 롯데마트 대표, 나영호 롯데온 대표 등 롯데쇼핑의 최고 경영진을 모두 외부 출신으로 바꾼 것은 그만큼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롯데쇼핑을 바라보는 증권업계 시선은 여전히 냉랭한 편이다.
9일 롯데쇼핑 관련 분석리포트를 낸 증권업계 의견을 정리하면 대체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변화의 가속화가 필요한 시기” “실적 가시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등이다. 대부분의 증권사는 롯데쇼핑 목표주가를 내렸고 투자의견을 중립(HOLD)으로 유지했다.
반면 롯데케미칼의 위상 확대는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롯데케미칼은 기존 주력사업인 석유화학제품 판매뿐 아니라 최근에는 수소와 배터리 등 미래 성장동력으로 진출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8일 실적발표를 통해 대산석유화학단지에 6천억 원가량을 투자해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소재를 만들고 이산화탄소 포집 및 액화설비를 새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된 순수 석유화학사업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포트폴리오 확장에 나서는 신호로 해석된다.
증권업계에서도 롯데케미칼을 놓고 당분간 석유화학사업의 부진이 있을 수 있지만 2차전지 소재사업 확대로 새 동력을 만들어낼 기회가 있다며 긍정적 의견을 내기도 했다.
롯데그룹의 화학사업은
신동빈 회장의 애정어린 사업이다.
신 회장이 한국 롯데그룹에 등장한 것은 1990년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상무를 맡으면서다.
그는 롯데그룹 부회장에 오른 뒤 KP케미칼, 말레이시아 타이탄 등 굵직한 인수합병을 주도했고 2015년 10월에는 삼성그룹에서 화학 계열사들을 3조 원가량에 인수하며 화학사업을 강화했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