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오랜 기간 현대차 노무를 이끈
윤여철 현대차 정책개발담당 부회장과
하언태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을 동시에 물러나게 하면서 노사관계의 새판을 짤 준비를 하고 있다.
정 회장이 미래차시대 핵심으로 여겨지는 글로벌 전기차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노사신뢰를 바탕으로 한 유기적 생산 체제를 반드시 구축해야 한다.
17일 현대차그룹 인사에서
윤여철 부회장과
하언태 사장이 동시에 퇴진하면서 현대차 노사관계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시선이 나온다.
윤 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을 대표하는 노무 전문가로 2000년대 초반부터 현대차 단체교섭을 이끌어 현대차 노사관계의 산 증인으로 평가된다.
2019년 국내생산담당 부회장에서 내려온 뒤 정책개발담당을 맡은 뒤에도 현대차 노사문제 전반을 총괄해왔다.
하언태 사장이 윤 부회장과 함께 물러난 점도 큰 의미를 지닌다.
하언태 사장은 현대차 대표이사 겸 울산 공장장을 맡아 2018년부터 현대차 노사 단체교섭에 사측 대표로 참여했다.
하 사장은 최근 3년 연속 단체교섭을 무파업으로 이끌었고 올해 3월 주총에서 3년 임기로 사내이사에 재선임돼 임기가 2년 이상 남았지만 이번 인사에서 고문으로 물러났다.
하 사장은
윤여철 부회장이 부회장에 오른 2008년 이사대우로 승진하며 임원생활을 시작한 뒤 노무분야 전문가로 윤 부회장과 손발을 맞춰왔다.
정 회장이 현대차 노사관계에 상징성을 지닌 윤 부회장과 하 사장을 동시에 물러나게 한 만큼 노사관계 새판 짜기를 준비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정 회장이 변화를 통해 현대차에 안정적 노사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미래차시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진다.
현대차의 앞으로 2~3년은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등 미래 모빌리티 전환을 위한 골든타임으로 평가된다.
현대차는 특히 이 기간 국내외 전기차 생산라인 구축과 관련해 주요 투자를 진행해야 하는데 신속한 의사결정과 투자집행을 위해서는 현대차 노조(전국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차가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는 차를 해외에서 생산하기 위해서는 단체협약에 따라 노사위원으로 구성된 고용안정위원회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 국내에서 전기차 생산라인을 새로 돌리려 해도 인력투입 등을 놓고 노조와 협의를 진행해야 한다.
전용 플랫폼을 활용하는 전기차는 내연기관차와 비교해 부품모듈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조립공정이 단순해져 투입인원 축소가 불가피하다.
전기차 전환에 따라 일감이 구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기차 공장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일은 노조 입장에서 달가울 리 없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몇 년 동안 미래차시대를 대비한 고용 안정을 주요 과제로 삼고 강하게 요구했다. 최근 선거에서 강성 집행부가 들어서며 내년 더욱 강경한 투쟁을 예고했는데 정 회장이 선제적으로 사측 협상라인을 바꿔 변화를 꾀한 셈이다.
내년부터 현대차 노사협상에서 사측 대표는 정상빈 정책개발실장 전무가 부사장으로 승진해 맡을 것으로 전해졌다.
정 부사장은 1968년 태어나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현대차 정책개발팀장, 정책기획팀장, 정책개발실장 등을 거쳐 윤 부회장의 후임 역할로 낙점된 것으로 파악된다.
2013년 말 인사에서 이사대우로 승진해 임원생활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부사장에 오르며 안정적 노사관계 구축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됐다.
정 회장이 노사협상에서 새 인물을 내세운 것은 앞으로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최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새 집행부 선거에서 지부장으로 선출된 안현호 당선인은 가장 강성으로 분류되던 후보였는데 선거 유인물에서 2007년 1월 현대차 시무식 폭력사태를 이끌어 울산구치소에 200일 동안 수감된 경험과 함께 당시 윤 부회장과 일화를 소개했다.
안 당선인은 선거 유인물 ‘사측이 두려워하는 단 한 명의 후보’에서 “무력충돌 당시 노무담당이었던
윤여철 사장 얼굴에 상처가 나기도 했는데 결국 사측은 성과급을 지급했다”며 “
윤여철은 아직도 부회장으로 노무를 진두지휘하고 있고 다시 한 번 박살낼 때가 왔다”고 말했다.
새 집행부가 윤 부회장이 이끄는 사측 대표를 향한 강경 투쟁을 예고한 상황에서 정 회장이 선제적으로 협상 대표라인을 바꾼 점은 노조의 기존 협상 태도에 변화를 유도해 결과적으로 사측의 협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정 회장은 그 누구보다 노사관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오너 경영인으로 여겨진다.
현대차 노조는 국내 최대 단일 노조 과거부터 강성 노조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정 회장은 30대 초반이던 2000년대 초반부터 현대차그룹 경영에 참여해 현대차 노사의 갈등과 화해의 역사를 모두 지켜봤다.
정 회장은 2020년 10월 회장에 오른 뒤 보름 만에 이례적으로 이상수 현대차지부장과 만나 1시간 넘게 발전적 노사관계와 관련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정 회장은 당시 “전기차 등 신산업시대에 격변을 노사가 함께 헤쳐 나가야 하고 변화에 앞서 나갈 수 있도록 합심해야 한다”며 “회장으로서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