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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순리에 역행하지 않으며 생각은 차분하게 행동은 과감하게 현대그룹을 이끌고 있습니다.”
현대그룹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현정은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현 회장은 현대그룹 경영전면에 나선지 13년 만에 중대기로에 서 있다.
정부가 부실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해운업에 대해 강력한 구조조정 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 회장은 현대그룹 자구안의 마지막 관문인 현대증권 매각이 좌초되면서 자구안을 다시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현대그룹 계열사 가운데 튼실한 현대엘리베이터는 부실 계열사 지원 의혹으로 신뢰를 잃고 있다.
현 회장은 세 갈래의 길에서 선택을 고민해야 할 처지에 몰려있다.
첫 번째 길은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가 유동성 지원에 나서 현대상선과 현대증권 경영권을 모두 지키는 것이다. 현 회장 입장에서 최선의 카드인 셈이다.
그러나 정부와 금융당국은 현대엘리베이터의 현대상선에 대한 지원이 ‘언발의 오줌누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두 번째 길은 현 회장이 현대상선을 포기하고 현대증권만이라도 건지는 것이다. 현 회장으로서 현대그룹의 적통성을 사실상 잃게 되는 것이지만 실리적으로 차선책은 될 수 있다.
세 번째 길은 현 회장에게 최악의 상황이다. 현대증권과 현대상선을 모두 잃고 현대엘리베이터만 남는 경우다.
이 경우 현 회장은 현대그룹의 명맥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현대엘리베이터 등 몇몇 계열사만 거느린 ‘소그룹’으로 전락하게 된다.
현 회장은 어떤 길을 '순리'로 선택하게 될까?
◆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의 속내
1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그룹 계열사 지원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증권 지분을 현대엘리베이터가 사들이는 방식으로 현대상선에 유동성을 지원하고 현대증권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 한다는 것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 6일 2050억 원 규모의 사모전환사채(CB)를 발행했다. 만기이자율은 4%, 2020년 11월 6일 만기로 자금조달 목적은 '운영자금 마련'이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은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전환사채 발행이 현대그룹 계열사에 대한 자금지원 용도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희철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자금조달의 목적을 운영자금 확보로 기재했으나 구체적 용처에 대한 설명은 없다”며 “연초에 실시한 2천774억원의 유상증자로 재무구조가 안정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용도가 설명되지 않은 이번 CB 발행은 시장의 의구심을 더 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 7월에도 27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해 순차입금을 모두 갚았다.
현대증권 매각이 무산되고 현대상선의 유동성 위기가 현대그룹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현대엘리베이터 유상증자를 바라보는 의심의 눈길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산업은행은 최근 현대그룹 경영진을 만나 만기가 돌아온 현대상선 차입금 2천억 원의 만기를 2개월 연장하는 대신 추가적 자구안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상선은 오릭스PE에 현대증권을 매각하려던 계획이 불발되면서 차입금 상환도 미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를 앞세워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증권 지분 22.43%, 현대아산 지분 67.58%를 사들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증권 지분을 인수할 경우 대출금을 제외하고 현대상선에 4400억 원 규모의 자금이 유입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되면 현대상선의 유동성이 단기적으로나마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산업은행과 금융당국이 이런 방안을 수용할지 미지수다. 산업은행 등은 해운업 불황이 깊어지고 현대상선 적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현대상선의 유동성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대책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증권 인수자금을 조달할 여력도 크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대증권 인수자금은 장부가 기준 6381억 원에 이른다. 현대엘리베이터 자체는 유상증자를 통해 재무여건이 호전됐지만 부실 계열사 지원 의혹을 받아 회사채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엘리베이터의 현금창출 능력은 유상증자 대금을 포함해도 1천 억~2천 억 원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마디로 현대증권을 인수할 실탄이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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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가운데)이 지난 2월26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대한상공회의소 챔버라운지에서 열린 ‘최경환 부총리 초청 전국상의 회장단과의 정책간담회’에 참석해 설명을 듣고 있다.<뉴시스> |
◆ 현대증권에 욕심 부리다 위기 자초했나
정부와 금융당국은 현대상선 구조조정에 대한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다.
현대그룹은 현대증권을 매각해 자구계획을 이행할 계획이었으나 매각이 불발되면서 이런 계획이 틀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룹의 주력인 현대상선 재무구조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현대증권 매각 불발이 현정은 회장에게 뼈아플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현 회장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는 말도 나온다.
현대증권 매각 불발의 실질적 이유로 ‘파킹딜(Parking Deal)’이 지목된다.
현대증권 매도주체인 현대상선이 매각지분을 되사올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면서 사실상 지분을 잠시 옮겨놓은 것 아니냐는 논란이 불붙었고, 이 점이 오리스에 부담을 안겨 결국 현대증권 인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증권 매각불발로 초래된 현재의 위기는 현 회장의 욕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며 “이는 현대가의 적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금강산사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지적했다.
현대그룹은 2013년 말 3조3천억 원 규모의 대규모 자구계획안을 내놨다. 현대상선 액화천연가스(LNG) 운송부문(9700억 원), 현대로지스틱스(6천억 원), 컨테이너와 보유주식(4500억 원)을 매각하는 등 자구계획안을 차근차근 밟아왔다.
그러나 자구계획안의 마지막 관문인 현대증권 매각이 무산되면서 이런 노력들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애초 현대그룹이 내놓은 자구안 가운데 이행률은 87.6%(2조9289억 원) 수준이다.
금융권은 현대상선을 포함한 현대그룹 계열사가 올해 안에 갚아야 할 차입금 규모가 회사채 3900억 원 등 약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내년은 더 문제다. 현대상선이 갚아야 할 회사채 6천 억 원, 대출 3천억 원 등 약 1조 원의 차입금 만기가 돌아온다.
그러나 현대상선이 해운업계 전체에 덮친 불황의 파고를 넘기 어렵다는 것이 정부와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현 회장에게 차선의 선택은 현대상선을 포기하고 현대증권을 지키는 것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대증권은 지난해 순이익 176억 원을 냈고 올해 6월 말 기준으로 순이익 1262억 원을 거뒀다. 현 회장이 현대상선 못지 않게 현대증권에도 애착을 보이는 만큼 둘 다 지키기가 어렵다면 해운업황 자체가 악화해 미래가 불확실한 현대상선보다 순이익을 내는 현대증권을 선택하는 것이 현대그룹의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상선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확인된 마당에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을 모두 지키려고 하다가는 돈줄을 쥐고 있는 산업은행 등의 대응에 따라 현 회장은 둘 다 놓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이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을 모두 놓칠 경우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만 남는 운명을 맞이할 수도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