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금융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8월 소비자물가가 사상 처음으로 하락하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더 인하해야 한다는 요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 총재를 향해 경기부양을 위한 완화적 통화정책 요구가 높아진 상황에서 물가상승률 하락은 기준금리 인하의 압박 강도를 더욱 높이는 요인이다.
통계청이 3일 발표한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8월 소비자물가 지수는 104.81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038% 떨어졌다. 소비자물가지수가 떨어진 것은 관련 통계작성 이래 처음이다.
8월 소비자물가지수의 하락을 놓고 일부에서는 한국 경제에 디플레이션 위험이 높아졌다며 이 총재가 더 적극적으로 완화적 통화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물론 소비자물가지수의 하락만으로 디플레이션 위험이 높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물가의 흐름을 디플레이션이라고 판단하려면 물가 수준의 하락이 상품 및 서비스 전반에 지속돼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8월 소비자물가 하락은 농산물, 원유 등 일부 품목의 시세 하락 때문이므로 디플레이션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은행도 근원물가지수가 1% 초중반대의 오름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디플레이션 우려에는 선을 그었다. 근원물가지수는 계절적, 외부적 요인 등으로 물가변동이 심한 품목을 제외하고 산출한 물가지수다.
다만 한국의 물가 흐름이 디플레이션은 아니라고 보는 쪽에서도 현재 한국의 물가상승률이 낮다는 점은 인정한다.
정성태 삼성증권 연구원은 “소비자물가지수의 하락은 11월 중으로, 0%대의 물가상승률은 2020년 상반기 중에 해소될 것”이라면서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낮추는 단기적 요인들이 해소되더라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장기적으로 한국은행의 목표치인 2%를 밑돌 가능성이 크다”고 바라봤다.
증권업계에서는 2020년 상반기까지 기준금리가 두 차례 인하돼 연 1.00%까지 내려갈 것으로 보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총재가 추가적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장 큰 고려 요인은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여력이다.
이 총재는 올해 7월 금융통화위원회를 통해 3년여 만에 기준금리를 인하했다.
7월 기준금리 인하로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연 1.50%가 돼 역대 최저치인 1.25%까지 한 차례의 인하 결정만 남았다. 증권업계가 바라보는 연 1.00% 대 기준금리는 지금까지 전례가 없다.
이 총재로서는 기준금리가 과도하게 낮아져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 효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기준금리를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낮춰 놓으면 한국경제에 긴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한국은행이 동원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크게 좁아진다.
이 총재는 8월 금융통화위원회를 마친 뒤 “과거에 비해 정책여력이 충분하다 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경제상황에 따라 필요시 대응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여력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실효하한 이하로 기준금리를 내린다는 것에는 당연히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세를 이어가고 가계부채 규모가 계속해서 늘고 있다는 점도 이 총재의 기준금리 인하 결정에 부담을 안길 요소다.
7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서도 한 위원은 “주택 및 부동산 관련 대출은 상반기 중 증가세가 둔화됐지만 앞으로 더욱 완화적 금융 상황을 배경으로 금융불균형 누적 정도가 다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불균형이란 저금리 때문에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부동산시장으로 자금이 쏠리는 부작용을 의미한다.
원/달러 환율도 고려요소 가운데 하나다. 세계적으로 미국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다 한국경제의 대외불확실성 확대로 원/달러 환율은 8월부터 꾸준히 1200원을 웃돌고 있다.
이 총재는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 환율은 직접적 고려요소는 아니다”라면서도 “그렇지만 최근 대외여건의 불확실성이 높아졌기에 환율변동성도 커진 만큼 앞으로 통화정책의 고려 과정에서 환율의 변화도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