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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2일 오후 서울 남산공원 백범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뉴시스> |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서울시장을 향해 가는 길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현대중공업 주식 처리다. 정 의원은 이 문제가 나올 때마다 “법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야당의 공세는 그치지 않는다. 정 의원 캠프는 재단에 주식을 출연하는 방안을 깊이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지난 9일 조달청이 제출한 ‘서울시와 현대중공업 계열사 간 거래 실적’을 토대로 현대중공업과 계열사가 서울시와 거래한 계약 내역을 제시하며 현대중공업과 서울시장의 직무 관련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상수도사업본부 운영센터 시스템 구축, 도로사업소 차륜형굴착기 구매 등 총 71억208만 원 규모의 계약 27건을 서울시와 체결했다. 현대오일뱅크도 5년 동안 서울시와 계약 26건(81억2014만 원)을 맺었다. 전체 53건의 계약 중 31건은 수의계약이었다.
박 의원은 이를 놓고 “공직자윤리법 시행령 제27조8항을 보면 직무관련성 판단은 공사와 물품의 계약에 관련되는 직무에 종사하거나 그 직무를 지휘·감독하는지를 고려하게 되어 있다”며 “정 의원의 현대중공업 주식은 서울시장직과 직무관련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정 의원은 주식 백지신탁을 선언해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 의원 측은 즉각 반박했다. 정 의원 측의 박호진 후보 경선준비위원회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정 의원의 현대중공업 주식과 서울시장직 직무의 관련성은 시장 당선 후 백지신탁심사위원회가 판단할 일”이라며 해당 심사위원이 아니라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야당의 이런 공세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박 대변인은 “정 의원의 지지도가 상승하면서 박원순 서울시장 진영에서 앞으로도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많이 할 것 같다”고 우려하고 있다. 야당 뿐 아니라 새누리당 내부 경선 과정에서도 김황식 전 총리 등 상대 후보가 현대중공업 주식에 대해 공세를 펼칠 수도 있다.
정 의원 본인도 이날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야당 공세에 대해 “법대로 주식을 맡기겠다”며 이미 국회에서 상임위을 바꿀 때마다 심사를 받아 별 문제없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주식 백지신탁은 공직자와 그의 배우자 및 직계존비속이 직무와 관련된 주식을 3000만 원 넘게 지녔다면 이를 매각하거나 은행 등 대리인에게 맡겨 재산운용에 간섭할 수 없도록 처리하는 제도다. 공무원이 직무를 통해 얻은 정보로 재산을 부당하게 얻는 것을 막고 공정한 국정수행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로 2005년 11월 도입됐다. 대상은 국회의원과 장·차관 등 1급 이상 고위공직자, 그리고 기획재정부·금융감독원의 4급 이상 공직자다. 서울시장도 대상에 포함된다.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로 10.15%를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보유 주식의 평가 총액은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1조9719억 원에 이른다.
정 의원은 주식 백지신탁 문제가 나올 때마다 ‘법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하지만 이런 입장과 별개로 지난해 12월 정 의원 측에서 “자체적 판단으로 서울시장 직무와 현대중공업 사업은 관련성이 낮다고 본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은 본사가 울산이며 주력 업종도 선박·건설기계·제조 등 수출 위주라 서울시 직무와 큰 관련은 없다는 분석도 있다. 다만 현대중공업 계열사인 현대오일뱅크·하이투자증권·호텔현대 등은 서울에 본사가 있어 직무관련성이 높을 수도 있다.
규정대로라면 정 의원이 6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을 경우 안전행정부 산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가 소집돼 현대중공업과 서울시의 직무 관련성을 따지게 되고 이곳에서 직무 관련성이 있다는 심사가 내려지면 정 의원은 보유한 주식을 포기해야 한다.
정 의원도 공식 출마 선언 이후인 지난 3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직무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현대중공업) 주식을 매각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 경영권을 포기할 만큼 정 의원이 서울시장 당선에 대한 열망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정 의원이 서울시장에 당선된 뒤 주식을 백지신탁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경우 재계 순위 7위인 현대중공업이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 간에 이루어지던 순환출자 구조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중공업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만큼 당장 변동이 생기진 않을 수도 있지만, 정 의원의 지분 매각이 현실화하면 그룹의 지배구조가 흔들리게 된다.
정 의원이 장남인 정기선 현대중공업 수석부장에게 주식을 인계하는 방안도 당장 실행하기 어렵다. 정 수석부장에게 주식을 물려줄 경우 50% 수준의 막대한 증여세를 내야 한다. 또 현대중공업 주식과 서울시장 직무관련성이 높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현행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직계존속인 정 수석부장의 주식도 백지신탁 대상에 포함될 수도 있다.
정 의원이 선택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은 재단에 지분을 증여하는 방안이다. 현재 아산사회복지재단과 아산나눔재단은 현대중공업의 지분을 각각 2.65%와 0.65% 보유하고 있다. 정 의원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지난 2011년 설립된 아산나눔재단은 정 의원이 명예이사장으로 있다. 설립 당시 2천억 원의 사재를 내놓았다. 이 곳에 주식을 출연할 경우 지분매각 후에도 현대중공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무리가 없다.
재단에 주식을 출연하는 방안을 추진할 경우 막대한 증여세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도 정 의원에게 매력적이다. 두 법인 중 하나만이라도 ‘성실공익법인’으로 인정받게 되면 정 의원은 지분을 넘길 때 전액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증여세법에 따르면 기존 보유지분과 상관없이 공익법인은 5%, 성실공익법인은 10% 이하의 지분을 출연받을 경우 증여세를 내지 않는다. 두 법인 중 하나만 성실공익법인으로 인정돼도 정 의원이 보유한 현대중공업 지분 10.15%를 한 곳당 10%가 넘지 않게 나눠 출연하면 118억 원으로 추정되는 증여세조차 내지 않아도 된다.
성실공익법인은 국세청이 정한 조건 8개를 모두 충족하고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은 뒤 기획재정부 장관이 승인하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증여 이후에도 세금을 내지 않으려면 5년마다 시행되는 같은 확인 절차를 통과해 지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재단을 통한 주식 증여는 정치인들이 흔히 선택하는 방법이다. 재산 출연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국민에게 보여주면서도 재산에 대한 일부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 의원은 지난 2012년 대선 출마 선언 직전 ‘안철수 재단(현 동그라미 재단)’을 설립해 보유하던 1500억 원 상당의 안랩 주식 절반을 기부했다. 대선 출마에 따른 주식 보유 부담을 줄인 사례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재산 헌납을 약속한 뒤 약 331억 원의 개인재산을 출연해 2009년 8월 청계재단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