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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삼성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리더십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이 무산됐다.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이 대거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서 부담이 커지자 결국 합병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됐다.
이번 합병 무산은 삼성이 하면 다 된다는 그동안의 태도에 시장이 경고를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그룹은 그동안 '삼성이 하면 기준이 된다'는 식의 모습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이재용 부회장도 앞으로 삼성그룹을 이끌어 가는 데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삼성전자의 실적부진 탈출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마당에 이재용체제 들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사업구조 개편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 대한 이 부회장의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앞으로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삼성은 시장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살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삼성은 이번 합병 무산으로 당장 건설과 중공업의 사업구조 개편에 대한 동력을 잃게 된 것이 뼈아프게 됐다. 중장기적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을 구축하기 위해 지주회사를 설립할 때도 조심스러운 행보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 건설과 중공업 사업재편 제동 걸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은 올해 마지막으로 남은 삼성그룹 사업구조 재편 작업이었다.
이준 삼성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은 9월 초 수요사장단 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그동안 진행해 온 사업구조 재편 작업은 이미 연초에 결정됐던 사안”이라며 “예정된 것들을 마무리했으니 당분간 계열사 합병 등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사업재편은 지난해 9월 제일모직이 패션사업부문을 삼성에버랜드(현 제일모직)에 양도하면서 시작됐다. 소재사업만 남은 제일모직은 이후 삼성SDI에 합병됐다.
삼성SDS는 삼성SNS를 흡수합병한 뒤 14일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다.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의 합병으로 화학 계열사도 어느 정도 정리됐다.
삼성생명을 정점으로 하는 금융부문의 지배구조 단순화 작업도 이어졌다. 삼성전기와 제일기획, 삼성SDS 등 비금융계열사들은 보유하고 있던 삼성생명 지분을 모두 처분했다. 삼성생명은 삼성카드와 삼성화재, 삼성자산운용 등 금융계열사 주식을 잇달아 매입했다.
삼성에버랜드는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바꾼 뒤 연내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이 합병하면 다음 순서로 삼성물산 건설부문에 대한 사업구조 재편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건설부문을 흡수하거나 전자와 금융부문을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을 아래에 두는 작업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제기됐다.
하지만 이번 합병 무산으로 삼성그룹은 기존 방식대로 사업재편을 진행하기 어려워졌다. 사업재편으로 얻을 이익이 없다면 삼성의 시나리오에 얼마든지 제동이 걸린다는 시장의 경고가 나왔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합병 무산은 삼성그룹이 추진해온 사업구조 재편 작업 가운데 최초의 실패사례로 기록될 것”이라며 “‘시장은 우리가 추진하는 일에 항상 동의할 것’이라는 삼성식 사고방식에 시장이 경고를 보낸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시장의 입김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며 “향후 사업재편 작업도 쉽지만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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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왼쪽)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가운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 |
◆ 이재용 중심의 지배구조 개편도 난항 예상
이번 합병 무산으로 주목되는 것은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에 미칠 영향이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만 놓고 보면 합병실패가 지배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두 회사 모두 오너 일가의 지분이 전혀 없는 데다 이들 회사 역시 제일모직이나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핵심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그룹 핵심 지배구조는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삼성물산→제일모직’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인데 두 회사 모두 여기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며 “사업재편이라면 모르겠지만 지배구조 개편에 미칠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번 합병 무산에서 확인됐듯이 삼성그룹이 앞으로 벌이는 일이 주주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될 경우 기존 주주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될 수 있다는 점은 삼성에 부담을 안겨준다.
그동안 진행된 사업재편은 모두 이재용체제를 준비하기 위한 삼성그룹의 마스터플랜의 일부였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앞서 복잡한 지배구조를 단순화하고 향후 지주회사 전환까지 염두에 두고 사전 정지작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증권사들은 삼성그룹이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할 경우 이재용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제일모직이 지배구조의 정점에 서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부회장은 제일모직 지분 25.10%를 보유하고 있다.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인적분할해 지주회사와 사업자회사로 나누고 지주회사를 제일모직과 합병하는 방식으로 ‘삼성홀딩스(가칭)’가 탄생하는 시나리오도 나왔다. 경우에 따라서 삼성물산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지주회사에 포함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번 합병 무산으로 이런 시나리오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점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그룹의 제일 과제는 그룹에 대한 이재용 부회장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쪽으로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인데 이번 합병 무산으로 어떤 변화를 추진하든 시장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됐다”며 “경영권 승계를 조속히 끝내야 하는 삼성으로서 큰 고민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삼성그룹이 3세로 경영권이 승계되는 과정에서 계열분리를 추진하려고 해도 만만찮은 부담을 안게 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동안 재계는 삼성그룹이 분리돼 승계된다면 이재용 부회장이 전자와 금융, 건설 등 핵심 계열사를 받고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유통과 레저, 서비스 부문을 맡고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이 패션과 광고 부문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 분리를 위해서 회사 분할과 합병을 추진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주주가치가 훼손된다고 판단할 경우 시장이 그대로 지켜보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본다.
증권가의 한 관계자는 “모든 권위는 처음 한 번 무너지기가 어려울 뿐 일단 한번 흠집이 나면 이를 앞세워 일을 추진하기가 힘들어진다”며 “이번 합병 무산은 시장에서 삼성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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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오른쪽) |
◆ 시험대 오른 이재용 리더십
삼성이 이재용체제로 옮겨가기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사업구조 개편이 좌초됐다는 점에서 이번 합병 무산은 뼈아프다.
삼성전자가 최악의 실적부진에 빠진 상황에서 이를 만회할 탈출구와 새로운 성장동력을 모색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실패가 계속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그동안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사업구조 개편을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으로 일단 마무리하고 삼성전자의 실적 회복에 집중해 이재용체제의 개막을 준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은 아직까지 삼성을 이끌 후계자로서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소설가 복거일씨는 지난 9월 열린 삼성 수요 사장단회의 강연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꿈을 보여준 적이 없다”며 “삼성 후계자로서 자신이 가진 꿈을 세상에 선보여야 할 때”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삼성이 추진하고 있는 굵직한 일들이 계속 좌초된다면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지난 9월 한국전력 부지를 놓고 현대자동차그룹과 벌인 입찰경쟁에서 패배했다. 당시 최종 결정은 이재용 부회장의 몫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부회장으로서 실패를 맛본 것이다.
하지만 한전부지 인수의 경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비해 합리적으로 선택을 하고 실패했다는 점에서 그다지 큰 타격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삼성의 해명대로 이번 합병이 이건희 회장 와병 전에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고 해도 결국 무산됐다는 점은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에 흠집을 내기에 충분하다. 합병이 무산된 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직원들 사이에서 “차라리 잘 됐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사업재편이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진행할 경우 먼저 주주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해졌다”며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오너인 이재용 부회장밖에 없어 앞으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 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민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