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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왼쪽)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오른쪽) |
금융지주체제가 흔들린다.
KB금융 내분사태가 결국 이건호 국민은행장의 사임을 낳았다. 최수현 금감위원장이 4일 중징계를 결정하자 이 행장은 곧바로 사임했다. 다른 당사자인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은 일단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건호 행장의 불명예 퇴진을 낳은 KB금융 내분사태는 금융지주체제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지고 있다.
KB금융의 내분사태는 단지 임 회장과 이 행장 두 사람의 성격이나 경영철학의 차이에서 빚어진 게 아니다. 금융지주에서 은행이 차지하는 위상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지주회사와 은행으로 이원화된 지배구조의 틀이 결국 내분사태를 잉태했다.
특히 임 회장이나 이 행장은 KB금융맨이 아니다. 둘 다 외부 출신이다. 이런 점이 금융지주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KB금융 내분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두 수장은 권력투쟁을 했다”며 “금융지주체제가 그런 권력투쟁을 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여겨 왔던 금융지주체제의 성과와 한계를 냉정히 평가하고 발전방향을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은행 수익이 절대적인 금융지주체제의 취약성
국내에 ‘금융계 4대 천왕’이라 불리는 금융지주들이 있다. 국민 신한 하나 우리를 말한다. 최근 우리금융지주 대신 농협금융지주를 꼽고 있다.
그런데 금융지주는 은행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수익구조를 지니고 있다. 금융지주에서 은행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60~90%나 된다.
KB금융도 마찬가지다. 국민은행은 그동안 금융지주 전체의 80% 이상이 되는 수익을 내왔다. 국민은행은 전국에 5천여 개 점포가 퍼져 있어 ‘소매금융 최강자’이자 ‘리딩뱅크’로 자리매김했다.
이렇다 보니 다른 금융지주의 은행에 비해 은행장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곧 금융지주체제에서 1인자와 2인자의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임 회장과 이 행장은 취임 이후 KB금융 안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물밑경쟁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 회장은 금융지주 회장이라는 자리를 무기삼아 국민은행까지 영향력을 뻗치려고 했다. 이 행장은 이에 맞서 국민은행에 대해 독자적 의사결정권을 고수하기 위해 맞섰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다른 회사보다 위계질서가 확고한 금융지주회사에서 권력을 잡으려면 먼저 내부에서 강한 존재감을 보여줘야 한다”며 “임직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두 사람이 부단히 애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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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주총회서 의사봉 두드리는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 |
◆ 경영보다 정치하게 하는 금융지주체제
이번 KB금융사태의 내분을 촉발한 주전산기 교체도 사실상 두 사람의 영향력 싸움이었다.
이 행장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금융지주와 은행간 주요사안을 투명하게 협의한다면 개입의 문제는 없다”며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은행이 2001년 주택은행과 합병 이후에 내부 채널갈등이 심화된 것도 회장과 행장의 주도권 싸움의 토양이 됐다. 국민은행은 1만7천여 명의 직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노조가 3개나 된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임원진은 두 갈래 채널로 나뉘어 경영진이 바뀔 때마다 깊숙이 관여해 왔다. 각자의 파벌을 만든 다음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줄서기를 했다.
임 회장과 이 행장이 취임할 때도 역시 이 채널갈등은 계속됐다. KB금융 내부에서 임 회장 사람은 ‘임 채널’ 이 회장 사람은 ‘이 채널’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KB금융의 한 임원은 “임 회장과 이 행장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두 사람 중 어느 쪽에 줄을 서는지에 따라 임원들의 운명이 갈리고 있다”며 “채널갈등은 KB금융의 오래된 치부”라고 말했다.
◆ 관치금융과 결합해 더 취약해진 금융지주체제
KB금융은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2001년 합병한 뒤 2008년 금융지주체제로 전환됐다. 그렇지만 KB금융에서 ‘지배구조 리스크’가 다른 금융지주회사들에 비해 더욱 취약해 관치금융 논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KB금융의 한 고위 관계자는 “회장이 타고내려 온 줄과 행장의 줄이 달라 시너지는커녕 서로 소 닭 보듯 한다”며 “각자 믿는 구석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KB금융에서 내분사태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치달은 데에 임 회장이나 이 행장 모두 ‘KB정통맨’이 아니라 외부출신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이 행장은 연구위원장과 교수직을 지내다 2011년 국민은행 부행장으로 임명돼 KB금융에 몸을 담았다. 임 회장도 재무부 관료 출신으로 취임 때부터 ‘관피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업지배구조원의 한 연구원은 “전반적으로 외부에서 추천을 받아 들어오는 최고경영자들은 회사사정이나 기업문화 등을 고려하는 데 부족할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권한을 확대하려다 반발에 부딪히기 쉽다”고 말했다.
KB금융의 경우 결과적으로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의 충돌로 비화됐다는 것이다.
KB금융의 경우 올해 5천억 원에 이르는 도쿄지점 부실대출, 카드사 정보유출사고 등 악재가 겹쳤다. 이에 따라 80여 명의 임직원이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도 두 수장 중 누구도 먼저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점이 KB금융의 금융지주체제 취약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금융지주의 경우 금융지주 회장이 내부에서 배출하면서 나름대로 정통성을 확보하고 은행장에 대해 권위를 세운다. 하지만 KB금융은 임 회장이나 이 행장이 모두 외부출신이라 이런 보이지 않는 통제장치조차 작동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KB금융 내분사태는 주인없는 금융지주체제가 관치금융과 결합해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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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호 KB국민은행장이 지난1일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주 전산기 교체 의사결정 논란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
◆ 금융지주체제에 제기되는 근본적 의문
우리나라에서 지주회사제도는 1999년에 도입됐다. 그뒤 일반기업이 은행을 소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규제 차원에서 2000년 금융지주회사법안이 따로 만들어졌다.
이후 2001년 우리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에 이어 2005년 하나금융지주, 2008년 KB금융지주가 차례로 생겨났다.
애초 금융지주체제를 도입한 것은 금융대형화를 꾀해 업무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계열사 부실이 은행으로 번지는 것도 막고 은행과 함께 증권이나 보험 같은 비은행계열사의 동반성장도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금융지주체제 도입 이후 13개의 금융지주회사가 국내 금융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7.2%로 늘어나는 외형성장을 했다.
하지만 금융지주체제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인 이동걸 동국대 교수는 "현재 금융지주체제는 시너지 창출이 미흡하고 위험관리 분산도 잘 안 되는 문제점이 있다"며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이 낙하산 시비에 휘말리면서 경영보다 정치를 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6월 열린 금융지주회사체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금융지주회사법 제정 후에도 업무다각화가 되지 않고 은행이 60~90%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지주회사 도입 취지는 퇴색하고 책임은 지지 않은 채 권한만 크게 갖는 기형적 구조가 됐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여겨 왔던 금융지주회사 체제의 성과와 한계를 이제라도 냉정히 평가하고 발전방향을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금융연구원 이시연 박사도 “금융지주회사 체제를 계속 끌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단계에 들어섰다”며 “정부가 금융지주회사 발전을 꾀하기보다 금융지주체제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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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행 노동조합원들이 지난 8월 서울 명동 KB국민은행에서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 출근저지 투쟁을 하고 있다. |
◆ 금융지주체제에서 잇단 권력투쟁
금융지주체제에서 비롯된 내부갈등은 비단 KB금융만의 문제가 아니다. KB금융뿐 아니라 다른 금융지주들도 한두번씩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 보니 금융지주체제가 과연 우리 현실에서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신한금융지주의 경우 4년 전 ‘신한금융사태’로 한바탕 홍역을 겪었다.
당시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이백순 신한은행장은 회장 후계구도를 놓고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과 다툼을 벌였다. 두 사람은 신 사장을 배임과 횡령혐의로 고소해 결국 법정으로 다툼이 번졌다.
신한금융사태는 표면상으로 배임횡령 등의 혐의를 놓고 벌어진 다툼이었지만 사실상 권력투쟁이었다. 30년 동안 선후배 사이었던 라 회장과 신 사장간 권력투쟁은 임직원들의 ‘편들기’와 ‘줄서기’로 번졌고 결과적으로 조직력이 크게 훼손됐다.
한동우 신한금융 회장은 “신한사태의 갈등은 신한답지 못하고 고객의 신뢰를 떨어뜨리며 후배에게 상처를 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하나금융지주의 경우에도 김정태 회장이 올해 초 외환은행장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황제 금융지주 회장’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김 회장은 김승유 전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윤용로 외환은행장을 물러나게 했는데 사실상 하나금융 내부의 라이벌 제거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