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드류 카네기와 J.P.모건 사이의 세기적 빅딜을 조율한 찰스 슈왑(Charles M. Schwab). 그는 앤드류 카네기의 카네기 스틸과 J.P.모건의 페더럴 스틸이 결합해 탄생한 US스틸의 초대 사장을 지냈다. 이후엔 베들레헴 스틸 사장으로 철강산업의 혁신을 이끌었다. ‘아메리칸 비즈니스 히스토리 센터’는 “한 산업에서 두 개의 최고 기업을 만들고 운영해 온 그의 성공은 아마도 기업 역사상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 US스틸 > |
[비즈니스포스트] “카네기 씨,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1901년 미국 금융계 거물 존 피어폰트 모건(J.P.모건)이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와 빅딜 이후 했던 유명한 말이다. 축사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앞으로 다가올 철강산업의 대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앤드류 카네기의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미국 철강산업의 상징이었던 카네기 스틸(Carnegie Steel)을 J.P.모건에게 매각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모건은 카네기 스틸을 인수한 뒤 자신의 페더럴 스틸(Federal Steel) 등 여러 철강회사와 합쳐 미국 최초의 10억 달러 기업 US스틸(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1세기 넘게 미국 철강산업을 지배했던 US스틸이 최근 일본제철(Nippon Steel)의 완전 자회사로 편입됐다. 인수 계약 1년 6개월 만에 최종 계약 마무리. 일본제철은 미국 정부와 국가안보협정을 맺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번 인수가 성사된 배경에는 일본제철이 트럼프 정부에 ‘황금주(Golden Share)’ 발행을 약속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황금주는 회사의 중요한 사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주식을 말한다. 이를테면 US스틸의 핵심 자산 매각, 해체, 고용 감축 등에서 미국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무상으로 US스틸의 황금주 1주를 받는다.)
이 같은 황금주 조항은 일본제철이 완전한 경영권을 확보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로, 일본 언론은 이를 “철강 보호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정치적 셈법”으로 보고 있다. US스틸과 일본제철의 결합은 결국 한국 철강기업들(포스코와 현대제철)에게는 대미 수출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부정적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철강산업의 패권 이동을 바라보면서 한 세기 전 US스틸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 US스틸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일본제철과 US스틸 로고가 나란히 장식되어 있다. 그 아래엔 ‘세계 최고의 역량을 갖춘 철강회사로서 함께 나아갑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 US스틸 > |
US스틸이 등장하기 전, 미국 철강 분야는 카네기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 카네기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베서머 공정(Bessemer process)’을 도입해 혁신을 이뤄냈다. 이 공정은 영국의 발명가 헨리 베서머(Henry Bessemer)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헨리 베서머는 1856년 고온의 선철에 고압으로 공기를 불어 넣어 불순물을 연소시켜 강철로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베서머 공정은 기존의 퍼들링 공정(puddling process: 쇳물을 휘저어서 선철을 강철화 시키는 제조 방법)보다 정련 시간도 훨씬 단축되었고, 비용도 10분의 1까지 낮췄다. 이런 강철의 대량생산은 철강산업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라 부를 만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민자 카네기가 영국의 헨리 베서머 제강소를 견학한 것이 1872년이다.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베서머 공정의 성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의 시대’가 가고 ‘강철의 시대’가 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카네기 자서전’, 선영사)
카네기는 훗날 철강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베서머 금상(Bessemer Gold Medal: 헨리 베서머를 기리는 상)’을 수상했다. (하나 덧붙이자면, 포스코 설립자인 고 박태준 명예회장이 1987년 현직 철강인으로는 처음으로 수상한 바 있다.)
베서머 공정 덕에 대량생산 체계를 구축한 카네기의 철강회사는 18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철강산업을 장악했다. 1900년까지 이런 흐름은 지속됐다. 그러는 사이 카네기도 65세라는 은퇴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 무렵, 막강한 자금력과 시장 지배력을 가진 ‘돈의 제왕(Money Master)’ J.P.모건이 서서히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때마침 거대한 거래를 조율할 한 인물이 등장했다.
▲ 필자는 최근 부산 기장에 있는 박태준 기념관을 찾았다. 포스코 설립자 고 박태준 명예회장의 철강 인생이 녹아든 공간이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철강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베서머 금상(Bessemer Gold Medal)’이다. 철강산업의 혁명과도 같은 ‘베서머 공법(Bessemer process)’을 발명한 헨리 베서머(Henry Bessemer)의 이름에서 따왔다. 영국금속학회에서 철강산업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이 상의 대표적인 수상자로는 앤드류 카네기가 있고, 현직 철강인으로는 박태준이 1987년 처음으로 수상했다. <이재우> |
1900년 12월 12일 뉴욕 대학의 클럽. 한 젊은 사장이 약 80명의 철강 사업가들과 금융업자들이 모인 저녁 만찬 자리에 초대받았다. 그의 이름은 찰스 슈왑(Charles M. Schwab). 카네기의 오른팔이자 35세 나이에 카네기 스틸 사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옆자리엔 J.P.모건이 앉았다. 슈왑은 만찬장에서 미국 철강업계의 미래에 대한 연설을 부탁받았다. 연설의 방향은 카네기 스틸 정리 문제로 흘러갔다.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슈왑은 사람들을 자신의 궤도로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연설은 만찬장 참석자들에게 전기 충격 같은 강렬한 영향력을 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J.P.모건은 연설에 너무 매료돼 트레이드마크인 시가에 불을 붙이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미국 잡지 아메리칸 헤리티지 인용)
철강산업을 현대화하고 난립하던 회사들의 통합 필요성을 느꼈던 슈왑의 비전은 J.P.모건의 욕망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카네기 평전’에는 “모건은 카네기 회사를 당장 사들이고 싶어 했다”고 나온다. (레이몬드 라몬-브라운 저, 도서출판 작은씨앗)
하지만 ‘떡 줄 사람’의 의중은 알 길이 없었다. 당시 이미 은퇴를 결심한 카네기는 자기 몰래 카네기 스틸 매각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카네기는 가장 유리한 ‘퇴장 타이밍’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남편이 가정과 자선에만 집중하길 원했다.
사실 J.P.모건과 카네기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모건이 1898년 페더럴 스틸(Federal Steel) 설립을 주도했을 때 카네기는 “안타깝지만 실패할 것”이라고 비웃었다. 여기에 질세라 모건은 “카네기는 가격 인하로 산업을 혼란에 빠뜨리는 인물”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카네기는 은퇴를 원했고, 모건은 철강 제국을 원했다. 이제 누군가 모건과 카네기 둘 사이에 ‘부싯돌’을 그어 불을 피워주기만 하면 됐다. 그 역할을 찰스 슈왑이 했다. 그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슈왑은 연설 이후 카네기에게 모건과의 회동 사실을 알렸다. 카네기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러곤 하룻밤 고민 후에, 종이에 매각 대금으로 4억 8천만 달러를 써냈다. 이를 훑어본 모건은 “이 가격이면 적절하다”며 단박에 OK했다.
‘카네기 평전’의 저자 레이몬드 라몬-브라운은 “둘 사이의 거래엔 아무런 입씨름도, 흥정도 없었다. 미국 산업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의 거래였다”고 했다.
성공적인 거래 덕분에 카네기의 그늘에 가려있던 찰스 슈왑은 순식간에 철강산업의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구시대의 영웅’(카네기)과 ‘새시대의 금융 자본가’(모건)를 연결한 완벽한 조율자였다. 그는 자신의 성공 요인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리더의 본질이라는 얘기다. 돌이켜보면, 카네기의 결단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US스틸이라는 거대한 신제국은 카네기가 스스로 ‘조용한 퇴장’을 택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은퇴 후 자선사업에 헌신하며 ‘퇴장의 품격’을 새롭게 썼다.
그렇게 철강 거인 카네기는 떠났고, 시장은 야심찬 모건의 천하가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모건은 카네기 스틸과 자신의 회사 페더럴 스틸의 지분을 통합해 US스틸 제국을 출범시켰다. US스틸의 설립은 훗날 ‘산업재편의 교과서’로 평가받게 된다.
찰스 슈왑은 어떻게 됐을까? 모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는 US스틸 초대 사장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실질적 권한은 모건 측 인물들이 쥐고 있었다. 이사회와의 갈등, 초거대기업의 관료화 그리고 혁신 부재를 실감한 슈왑은 1903년 회사를 떠났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쇠락해 가던 또 다른 철강회사 베들레헴 스틸(Bethlehem Steel). 이 회사 사장 자리에 오른 슈왑은 이번엔 협상가 대신 혁신가의 면모를 발휘했다.
▲ 미국의 마천루 시대를 상징하는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의 점심 식사(Lunch atop a Skyscraper)’ 사진. 1932년 9월 뉴욕 맨해튼 록펠러센터 건설 중, 지상 260m의 철제 빔 위에 앉아 있는 11명의 철공 노동자를 찍은 사진이다. 이 철제 빔이 찰스 슈왑의 베들레헴 스틸의 제품이다. <아메리칸 비즈니스 히스토리 센터> |
베들레헴 스틸은 ‘강철 구조물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H-빔(Wide Flange Beam)을 독점적으로 생산했다. 베들레헴 빔(Bethlehem Beam)이라 불린 H-빔은 오늘날 고층 빌딩과 대형 교량의 뼈대가 되는 구조용 철강재로, 20층 이상 건물을 올리는 데 사용된다.
찰스 슈왑은 이런 H-빔을 무기로 삼아 뉴욕의 마천루 시대를 열었다. 그러면서 베들레헴 스틸은 한때 US스틸을 위협하며 미국 제2의 철강회사로까지 성장했다.
한 세기가 고비였을까? 베들레헴 스틸은 대공황의 타격과 그 이후 외국 철강업체의 공세에 밀려 오랜 경영난 끝에 2001년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여러 인수 단계를 거쳐 2006년 세계 최대 다국적 철강회사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의 일부가 되었다.
찰스 슈왑은 어떻게 됐을까?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못한 채 1939년 빈털터리로 파산의 생을 마감했다. 타임지는 “아마도 사치스런 지출에다 1929년과 1937년의 주식시장 폭락으로 그의 재산이 사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그렇게 앤드류 카네기와 J.P.모건의 이름은 남았고, 찰스 슈왑의 이름은 잊혀졌다. 그러나 슈왑의 손끝에서 한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필자는 그런 그에게 한마디 던져본다.
“슈왑 씨, 당신이 설계한 철강 제국이 일본기업에 넘어갔소.”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