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1. 2018년 9월 브라질. 전직 대통령이었던 룰라(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는 법원 판결로 그해 10월 치러지는 대선에 노동자당 후보로 출마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당시 룰라는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부패 혐의로 무려 징역 12년 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룰라는 브라질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는 공감대가 브라질 국민 사이에는 널리 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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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4월25일 스페인 마드리드 카사아메리카에서 열린 비즈니스 포럼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 상황에서 브라질 법원은 룰라의 옥중 출마까지 막아선 것이다. 결국 그해 대선에서 군인 출신의 극우 정당 후보였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후보가 대통령에 손쉽게 당선됐다.
국민적 지지를 받던 정치인 룰라를 감옥에 가둔 건 세르지우 모루 판사였다. 정치인을 상대로 벌인 반부패 수사 일명 '세차 작전'을 통해서였다.
브라질에는 판사가 검찰과 경찰 수사를 지휘하는 사법제도가 있다. 이 제도에 따른 모루 판사의 뇌물 수사는 당시 여당이던 노동자당에 집중됐다. 반면 부패했던 보수 야당의 정치인은 수사에서 선택적으로 제외됐다.
모루 판사의 수사로 인해 룰라가 몸담았던 노동자당이 배출한 당시 현직 대통령은 탄핵당했다. 브라질 제도에서 대통령의 연임은 1회로 제한되나 중임에는 제한이 없었다.
이에 따라 룰라는 노동자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려 했으나 체포되고 말았다. 가본 적도 없는 아파트를 재벌 기업에서 받았다는 혐의였다. 룰라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법정에서 반박했다.
검사 측은 증거가 없는 게 증거라는 취지로 맞섰다. 법원은 이런 검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결국 브라질 정권은 바뀌었다. 그 뒤 모루 판사는 보우소나루 정부의 법무부 장관직에 올랐다.
#2. 2025년 5월1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고법으로 다시 파기환송했다.
지난 3월26일 2심 재판부는 이 후보의 2021년 대선 과정에서 했던 과거 발언이 주관적 의견의 표명일 뿐 허위사실 공표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대법원은 허위 사실 공표라고 판결했다. 이에 파기환송심에서 유죄가 나온 뒤 조희대 대법원장이 속도를 내 6월3일 대선 이전에 이 판결을 확정할 가능성이 나온다.
그렇게 되면 이 후보는 2018년 룰라처럼 대선 출마 자체가 막힌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 자체가 사라지고 경쟁 정당의 후보가 저절로 당선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정치적 후폭풍이 커졌다. 민주당에선 '사법부의 정치 개입'이라고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대선 기간에 대법원이 법치의 이름으로 압도적 지지를 받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할 국민의 권리를 막아 민주주의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정치 개입 의혹은 여러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제기됐다. 우선 과거 대법원의 관행과 달리 이 후보의 재판이 2심 무죄 뒤 약 한 달여 만에 속전속결로 처리됐다는 점이 꼽힌다.
대법원의 심리는 단 2번밖에 열리지 않았다. 이에 6만8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재판기록 전자문서를 대법원이 제대로 보지도 않고 판결을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은 전자문서 로그기록을 요구하는 100만명 서명운동을 펼쳐 목표인원을 바로 채웠다. 법원 사법정보공개 포털 누리집에도 로그기록을 요구하는 청구가 2만3천여 건이 쌓였다.
법원 내부에서조차 이례적 판결 속도를 놓고 현직 판사들의 비판이 거세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유죄 파기환송에 반대한 대법관 2인의 의견이 전체 판결문의 절반이 넘는다는 점이 전해지기도 했다.
법관의 자의적 판단이 강하게 작용한 이른바 '원님 재판'이나 '관심법 재판'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대표적 보수논객인 조갑제 조갑제 닷컴 대표나 정규제 전 한국경제 주필, 김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도 대법원의 자의적인 재판 정황과 선거 개입을 비판하고 나섰다.
대법원이 재판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긴급현안질의에서 사건기록 조회 결과, 대법원이 소부에 선거법 위반 재판이 배당되기도 전에 전원합의체 심리기일을 먼저 지정했다고 밝혔다. 이를 놓고 박 의원은 "심각한 절차 위반에 날림 재판으로 특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박선원 민주당 의원은 긴급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통해 '윤석열 전 대통령과 모 법무법인 변호사가 법조계 카르텔을 통해 이재명 대표를 초고속 판결을 통해 날려버리려 한다'는 요지의 제보를 받았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3. 2022년 3월 브라질. 룰라에게 반전이 일어났다. 부패 혐의로 감옥에 있던 룰라는 자유의 몸이 됐다. 모루 판사가 검사와 밀약해 불법 도청을 벌여 수사를 기획했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나서다.
룰라에게 내린 실형 선고가 무효라는 브라질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같은 해 10월 진행된 대선에서 룰라는 보우소나루를 꺾고 브라질 최초의 3선 대통령이 됐다.
소년공 출신의 룰라는 3번의 도전 뒤 2003년 브라질 대통령에 처음 당선됐다. 재선을 통해 2011년까지 재임하며 브라질의 경제를 살렸고 복지를 개선했다. 퇴임 당시 룰라의 지지율은 무려 80%에 달했다.
반면 룰라의 수감으로 당선된 보우소나루 재임 기간에 코로나19로 브라질 국민들은 숱하게 죽어나가야 했다. 보우소나루가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브라질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코로나19 사망자와 확진자가 나왔다.
브라질 경제는 어려움에 빠졌고 난개발이 벌어지며 아마존의 삼림도 심각하게 파괴됐다. 국제투명성기구(TI)에 따르면 보우소나루 재임 기간에 브라질의 부정부패 정도는 더 나빠졌다.
더구나 보우소나루는 대선 패배 뒤 극우 세력 및 군부와 모의해 룰라 암살과 쿠데타를 모의했다가 실패했다. 그 뒤 2025년 2월에야 보우소나루는 기소됐고 재판은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 두 번의 임기에서 브라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룰라 조차도 이번 3번째 임기에서는 고전하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브라질 법원의 정치화는 결과적으로 이 나라 전체의 민주주의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크게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셈이다.
우리나라 역시 윤석열 전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한 계엄을 감행했다가 탄핵 당하고 내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소년공 출신인 이재명 후보가 대선 후보 자격 박탈 위기에 놓인 점도 묘하게 과거 브라질의 상황과 묘하게 닮았다.
현재로선 우리나라의 2025년 대선 결과가 브라질의 2018년 상황과 비슷하게 돌아갈지, 아니면 2022년처럼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심이 15일 첫 공판을 진행한다. 이 후보가 2일 강원도 인제 원통시장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4. 법원은 대선 기간에도 이재명 후보를 향해 선거법 재판 파기환송심을 포함해 검찰이 기소한 혐의와 관련해 모두 5번의 재판 기일을 잡았다.
이는 대선후보 같은 공인이 아닌 개인이라도 급한 용무가 있으면 재판을 미뤄주는 법원의 일반적 관행과는 사뭇 다르다.
이에 민주당은 대선 기간 국민의 선택을 위한 선거운동을 명분으로 이미 잡은 기일을 취소하라고 법원을 향해 요청했다. 이를 법원이 수용하지 않으면 민주당은 직권 남용과 대선 개입 등 헌법과 법률 위반을 이유로 판사 탄핵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법원은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압도적 국회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각자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이 의도했든 아니든 대통령 선출을 좌우하게 되는 '법원의 대선개입'이 벌어지고 만 형국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이 후보가 법원 판결로 날아갈지 여부만이 이번 대선의 주된 관심사가 됐다. 이로 인해 거대 양당 후보의 대선 공약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재명 후보뿐 아니라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가 어떤 부동산 정책을 펼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전쟁에 어떻게 대응하며, 침체한 내수를 어떤 방법으로 부양할지, 에너지전환시대에 탄소중립을 어떻게 달성할지 등의 논의가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다. 대선이 선거가 아닌 상황이 빚어지고 만 것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5년을 좌우할 대선기간 한 달이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아니 사회체제 자체가 계엄과 탄핵에 따른 위기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창욱 건설&에너지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