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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현 CJ그룹 회장. |
‘모든 권력은 공포다. 권력은 그 스스로가 퍼뜨리는 공포를 먹고 산다.’
‘책상은 책상이다’란 소설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은 산문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에서 권력의 속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뒤집어 말하면 공포감이 클수록 권력을 체감하는 지수도 높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권의 권력과 CJ그룹 사이의 관계를 보면 CJ그룹은 권력에 대한 공포가 더욱 컸을 것으로 보인다.
권력은 재벌의 약점을 잡아 경영도 쥐락펴락하고 재벌은 결국 돈으로 이를 틀어막아야 하는 관계의 퍼줄조각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 권력과 기업의 공포, 박근혜 대통령과 CJ그룹의 인연과 악연은 어디서 비롯됐고 어느 시점에 꼬였으며 어떻게 풀려나갔을까?
◆ 제1막 : 이재현 구속, 이미경 퇴진
4일 정치권과 재계에 따르면 청와대 핵심인사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퇴진을 강요했다는 내용의 녹음파일을 MBN이 공개했는데 전화통화의 당사자는 조동원 당시 경제수석과 손경식 CJ 회장으로 확인되고 있다.
2013년 말 청와대 수석이 CJ그룹 최고경영자에게 전화를 걸어 ‘VIP’의 뜻이라며 이미경 부회장이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그뒤 이미경 부회장은 2014년부터 돌연 건강상의 이유로 경영일선에 물러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2월 공식 취임했는데 취임 첫해부터 CJ그룹은 위기에 몰렸다.
CJ그룹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약 3개월 뒤인 2013년 5월부터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받았고 결국 총수인 이재현 회장이 구속되는 사태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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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
CJ그룹은 효성그룹, 롯데그룹 등과 함께 박근혜 정부 들어 재계에서 대표적 사정대상 재벌로 꼽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CJ그룹이 이명박 정부에서 자산총액을 2배 이상 불릴 정도로 덩치가 커진 점에서 '친MB'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혔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CJ그룹은 2010년 온미디어, 2011년 대한통운을 인수하며 덩치를 급격하게 불렸고 CJ푸드빌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중점사업인 한식 세계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재현 회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 3년 이상 자유를 박탈당했다가 올해 8월 광복절 특별사면 및 복권을 받있다.
◆ 2막 : 오너 구하기 구명활동의 실패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이 구속된 뒤 전방위적으로 ‘이재현 구명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오너 구하기'에 돌입한 것이다.
CJE&M은 ‘연평해전’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등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영화들을 줄줄이 내놓았다. 계열사들에서 진행되는 방송대본은 물론이고 영화시나리오까지 사전검열을 하고 정권의 코드에 맞지 않을 내용이 있을 경우 폐기하고 있다는 얘기도 방송영화계 안팎에서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바짝 엎드리기’를 한 셈이다.
CJ제일제당은 2013년 6월14일 10대 일간지에 “더 살맛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백설이 대한민국 창조경제를 응원합니다”라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냈다.
2013년부터 "창조경제를 응원한다"는 방송광고는 지금도 CGV와 CJ계열 채널에 나오고 있다. '슈퍼스타K'등 CJE&M의 프로그램 말미에 “CJ가 대한민국 창조경제와 함께 합니다”라는 자막이 들어가기도 했다.
효과도 조금씩 나타났다. 박 대통령이 '스킨십'을 보여주며 화답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잦아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2014년, 2015년 CJE&M이 주최하는 음악 페스티벌 MAMA(마마)에 이례적으로 직접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MAMA는 문화를 통해 창조 산업을 발전시킨 글로벌 창조경제의 모범사례”라고 했고 '국제시장'을 직접 관람에 나서 눈물을 흘리는 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의 2심 재판을 앞두고 있던 2014년 8월 독도에서 열린 콘서트를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허민회 부사장이 직접 독도를 찾아 당시 정권의 숨은 실세로 알려졌던 정윤회씨를 만나기도 했다. 정씨는 당시 최순실씨의 남편이었다. 이 행사에는 박 대통령의 공식 팬클럽인 '호박가족' 맴버들도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법원은 2015년 9월10일 이 회장 사건에 대해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징역 3년, 벌금 252억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이라고 희망을 품었다. 12월15일 열린 파기환송심 당일 이재현 회장이 구급차 대신 검은 승용차를 타고 환자복이 아닌 양복을 차려입고 법원에 등장했다.
그러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서울고법은 이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2년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CJ그룹은 당시 "수형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인데도 실형이 선고돼 참담하다"며 "경영차질의 위기상황이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 3막 : '최순실 사업' 에 1조 지원, 이재현 사면복권
이런 상황에서 CJ그룹이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동앗줄은 박근혜 대통령의 사면복권 밖에 없었다.
CJ그룹이 최순실씨의 측근으로 문화계 황태자로 불려온 차은택씨와 얽히며 적극 지원에 나선 것도 이런 상황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부 주도사업에 적지 않은 지원금을 내놓고 정권에 코드 맞추기, 공식 라인을 통한 구명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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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경식 CJ그룹 부회장이 2016년 6월2일 프랑스 파리 아르코호텔 아레나에서 개최된 CJ KCON 2016 France에 프랑스 국빈 방문 중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다. <뉴시스> |
그런 만큼 박 대통령을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비선실세'를 잡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이번에 의혹이 불거진 문화창조융합벨트사업은 문화 콘텐츠 기획·제작·판매·재투자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문화사업 거점을 국내 곳곳에 건립하는 프로젝트이다.
CJ그룹은 서울 상암동 CJ E&M 본사에 문화창조융합센터를 연 데 이어 고양시에 K-컬처밸리를 조성하고 있다. K-컬처밸리는 한류를 주제로 한 복합 문화공간으로 2017년까지 1조4천억 원이 투입된다. CJ그룹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액수의 베팅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CJ그룹은 2015년 12월29일 K-컬쳐밸리 사업 우선 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문화창조벤처단지 개소식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손경식 CJ그룹 회장, 차은택 감독이 만난 직후였다.
박경미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세사람이 만난 뒤 CJE&M이 사업자로 선정된 것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다”고 말했다. CJ그룹이 대통령 특사를 염두에 두고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셈이다.
이재현 회장은 올해 광복절에 사면복권을 받았다. 유죄판결을 받은 기업인들 가운데 유일했다. 그리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물론 CJ그룹은 이재현 회장 사면을 위한 대규모 투자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고 있다.[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