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스 음랑가 옥스팜 영국 민간섹터 관여팀장. <옥스팜> |
[비즈니스포스트] "기업들이 갈수록 불안해지는 공급망을 안정화하려면 우선 이해관계자들의 인권 문제부터 챙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루스 음랑가 옥스팜 영국 민간섹터 총괄과 엘리나 아흐터베르그 옥스팜 네덜란드 비즈니스 인권정책 총괄은 "기업들이 사업에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원료공급자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공정무역 관행 정착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음랑가 총괄과 아흐터베르그 총괄은 지난 5일 옥스팜코리아가 주최한 ‘2024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콘퍼런스’에 주요 연사로 참석한 뒤 비즈니스포스트와 가진 별도 인터뷰를 통해 "기업들은 단기 비용 지출을 줄이기 위해 공급자들에 노동 가치에 부합하는 금액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두 사람은 코코아산업의 공급망 위기를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서아프리카 일대에서 주로 재배되는 코코아는 기후변화로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어 초콜릿 생산 글로벌 식품 기업들에 심각한 위기로 인식되고 있다.
음랑가 총괄은 “기후와 인권 문제가 다가오는 미래의 위협이 아니라 이미 발생하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코코아 문제만 봐도 이상기후와 작물 질병 문제로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어 글로벌 공급망에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조사업체 마켓인사이더 통계에 따르면 지난 2일 기준 코코아 선물가격은 1톤당 약 6811달러(약 912만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 약 3865달러(약 517만 원)와 비교해 거의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이에 글로벌 식품 기업들은 코코아가 들어가는 초콜릿 제품들의 가격을 인상하고 있다.
아흐터베르그 총괄은 “코코아 농부들은 그동안 노동한 만큼 충분한 자금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공급망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라며 “코코아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대다수가 영세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기업들로부터 정당한 금액을 받지 못하고 있어 생산에 차질이 오는 문제가 발생해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통상적으로 코코아 농부들 같은 공급자들이 어려운 상황이 처하면 지역 정부가 나서서 도움을 줘야 하지만 통상적으로 이들이 거주하는 개발도상국들은 지원 여력이 없는 곳들이 많다. 이들 공급자와 거래하는 외국 기업들은 여러 방법을 통해 납세 의무를 회피하기 때문에 개도국 정부들이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음랑가 총괄은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재정 상황을 보면 세금 납부를 회피하는 다국적 기업들 때문에 수십억 달러가 넘는 재정 적자를 감수하고 있다”며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정부패는 공급망 문제 해결의 발목을 잡는 한 요소지만 결과적으로 기업들의 납세 기피가 인프라 개선 등에 사용될 재정을 부족하게 만드는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흐터베르그 총괄은 “많은 기업들의 내부 운영 상황을 보면 세금 납부 체계가 굉장히 복잡하게 돼 있어 정당한 몫만큼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며 “이런 상태가 이어지면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공공기금(public fund) 마련을 저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공공기금이란 공급망 내에 있는 근로자들이 생산을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구축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 운영을 위한 자금을 말한다.
음랑가 총괄은 “현재 세계 사회의 경향을 보면 부자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기본적인 생존부터가 어려워지는 부의 편중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따라서 공공기금은 수입에 비례한 과세와 기업들의 성실한 납세를 통해 구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엘리나 아흐터베르그 옥스팜 네덜란드 비즈니스 인권정책 총괄. <옥스팜> |
앞서 올해 1월 옥스팜은 ‘2024 불평등 보고서, 불평등 주식회사’를 발간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코로나 위기 이후 세계 최상위권 부자 5명은 재산이 약 두 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같은 기간 동안 세계 인구 가운데 약 50억 명은 더 가난해져 국제적 불평등이 더 심각해진 것으로 파악됐다.
옥스팜은 각국 정부가 나서 민간 부문에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규제를 신설해 억만장자들과 기업에 편중된 부를 일반 시민들에 재분배할 수 있는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올해 4월에는 브라질,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페인 등 G20 국가 정부들은 세계 억만장자 3천 명을 대상으로 보유 자본의 2%를 '부유세(Wealth Tax)'로 부과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G20 국가들은 지난 7월 해당 방안을 올해 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주요 안건으로 다루기로 결의했다.
아흐터베르그 총괄은 “결국 이런 부의 불균등과 기업들의 납세 회피는 공공 의료 등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해지게 하며 나아가 여성 인권 문제로도 이어진다”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거동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몫은 대체로 여성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들이 그들이 올린 수익만큼 정당한 몫을 세금으로 성실하게 내놓고 이를 기반으로 공공기금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전문가는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는 공정 무역 관행 정착과 성실한 세금 납부뿐 아니라 인권 실사를 이행하는 일도 중요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7월 유럽연합(EU)는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을 시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CSDDD 내용을 보면 유럽 지역에서 연간 순매출 4억5천만 유로(약 6682억 원)를 내는 역외 기업들은 공급망 전반에 걸쳐 인권 실사를 실시해야 한다.
유럽에서 사업하는 한국 대기업들이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높고 대기업들이 포함된다면 이들과 공급망을 구성하는 한국 공급사들도 인권 실사를 요구받을 수 있다. 세계 벤치마킹 얼라이언스에서 실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인권 수준 평가에서 평균 28%보다 3%포인트 낮은 25%로 집계된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음랑가 총괄과 아흐터베르그 총괄은 한국 기업들이 이같은 국제 환경의 변화를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아흐터베르그 총괄은 “한국 기업들은 유럽 기업들을 보면서 그들이 너무 앞서 나가고 있어 이들을 따라잡기가 너무 막연하게 어렵다고만 생각하고 있다”며 “하지만 유럽 기업들도 이런 책임 경영을 시작한지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상황이고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들과 그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유럽 기업들이 지난 몇 년 동안 이뤄낸 변화가 대단히 놀라운 것은 맞지만 한국 기업들은 그들이 지금 너무 뒤처지고 있고 늦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며 “지금 당장 시작해도 굉장히 빠르게 인권 실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고 강조했다.
음랑가 총괄은 “개인적으로 이번에 한국에 오면서 대단한 기회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 봤다”며 “한국은 반도체와 자동차 등 세계 전체로 봤을 때도 굉장히 우수한 산업을 여럿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래서 나는 한국 기업들이 인권 실사 문제에 리더십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다른 국가들을 선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 본다”고 덧붙였다.
음랑가 총괄은 사회적 정의, 성평등, 기후 대응 분야에서 10여 년간 활동한 전문가로 기업 인권 수준을 평가하는 세계벤치마킹얼라이언스(WBA)에서 긍정적 인권영향 평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흐터베르그 총괄은 파리정치대학을 졸업했으며 현재 인권정책과 공급망 인권 관리 부문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벤치마킹얼라이언스에서 인권 전문가 위원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과거 지속가능성 싱크탱크 '프로펀도(Profundo)' 등 여러 연구단체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