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현장에서 화석연료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참가자.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발표된 합의문 초안에서 전 세계적 화석연료 ‘단계적 퇴출(phase out)’ 규정이 빠지자 유럽연합(EU)과 태평양 도서국가 등 기후피해 취약국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COP28 의장실이 총회 종료 전에 초안을 다시 발표고 밝혔지만 ‘퇴출’ 규정이 다시 들어가지 않는 한 산유국과 화석연료 업계가 이번 총회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의심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1일(현지시각) 저녁 ‘파리협정에 따른 첫 전 지구적 이행 점검의 의장 합의문 초안(The First Global Stocktake under the Paris Agreement, Draft Text by President)’이 공개됐다.
전 지구적 이행 점검(GST)이란 각국의 파리협정 이행 여부와 장기목표 달성 가능성을 확인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뜻한다. 2015년 기후총회 참가국들은 세계 기온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하로 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 파리협정에 합의했으며 2023년부터 5년 단위로 전 지구적 이행점검을 하기로 했다.
이에 이번 COP28은 많은 기대를 받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번 전 지구적 이행 점검 결과에 따라 기후대책 강화가 명문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특히 주목받은 것은 화석연료의 단계적 감축의 명시 여부였다. COP28 의장 주관하에 참여국 모두가 서명하는 합의문은 국제적 서약으로서 강제력은 없어도 각국이 준수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화석연료의 감축을 합의문을 통해 규정하면 화석연료 기업들과 산유국들은 화석연료 생산을 줄이거나 최소한 함부로 늘릴 수는 없게 된다.
이번에 공개된 합의문 초안에는 이번 COP28 논의 사항들이 모두 포함됐다.
대표적으로는 이미 130개국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3배 늘리고 매년 에너지 효율을 2배 개선하기로 한 서약이 포함됐다.
그런데 이 초안을 두고 각국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는 이유는 기후목표 이행을 규정한 용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유엔기후변화협약를 통해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온실가스 배출에 빠르고 지속적인 감축이 필요하다”고 규정한 후 “이를 위해 각 당사자는 이하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다(could take action)”고 표현했다.
‘이하와 같은 행동’으로 묶인 규정 사항 가운데에는 화석연료도 포함됐지만 사실상 각국 재량에 맡길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놨다.
합의문 초안에 따르면 “화석연료의 생산과 소비 모두 2050년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위해 과학적 근거에 의거해 질서 있는(orderly) 방식으로 감축한다”고 명시됐다.
기후피해 취약국들과 유럽 등 서구 선진국들은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을 주장했으나 이 단어는 들어가지 않았다.
▲ 11일(현지시각)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현장을 걷고 있는 술탄 아흐메드 알 자베르 의장. <연합뉴스> |
가디언과 로이터 등 주요 외신들은 이번 합의문 초안에서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이 빠진 배경에는 기후총회에서 화석연료 업계의 영향력이 강해진 영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11일(현지시각) 이번 COP28 현장에서 ‘기후변화가 거짓’이라고 주장한 전적이 있는 이권단체 166곳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이 가운데는 석유회사들도 일부 포함됐다.
데이비드 아미악 비영리단체 ‘미디어와 민주주의 센터’ 연구국장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이들은 기후총회를 방해하기 위해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참가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화석연료 업계의 참여도 역대 최대 규모로 이뤄졌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번 COP28 현장에 참석한 것으로 확인된 화석연료 관련 로비스트는 2456명으로 브라질을 제외한 각국 대표단보다도 숫자가 많았다.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과 비교하면 4배 늘어난 숫자다.
로이터는 11일(현지시각) 이 때문에 환경단체 등 일각에서는 산유국에서 회의가 열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COP27과 COP28 모두 산유국 이집트와 아랍에미리트에서 개최됐기 때문이다.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인 아제르바이잔 역시 산유국이다.
아이칸 하지자 아제르바이잔 외교부 대변인은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산유국에서 기후총회가 열리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그러한 시각을 이해한다”며 “아제르바이잔은 산유국이기도 하지만 태양광과 풍력 등 에너지 다변화에 주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10일(현지시각)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는 붑커 훅스트라 유럽집행위원회 기후행동 책임위원. <연합뉴스> |
유럽연합은 이번 합의문 초안에 곧장 반발하고 나섰다.
붑커 훅스트라 유럽집행위원회 기후행동 집행위원은 “그 장문의 초안 안에 몇 가지 좋은 점이 있기는 하고 더 좋은 점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
훅스트라와 대표와 유럽연합 대표단을 공동으로 이끌고 있는 테레사 리베라 스페인 환경부 장관도 같은 의견을 내놨다.
그는 “현재 초안을 놓고 보면 이건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우리는 1.5도 목표를 위해 싸워야 하는데 이 초안으로는 필요한 만큼 에너지 개편을 진행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초안과 관련해 COP28 의장을 포함한 다른 모든 파트너와 이권단체들과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후피해 취약국으로 분류되는 태평양 도서국가의 대표들도 이번 합의문 초안 내용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세드릭 쉬스터 군소 도서 국가 연합(AOSIS) 의장은 가디언을 통해 “우리는 화석연료 퇴출에 주력하기로 약속하는 문서가 아니라면 절대 서명할 수 없다”며 “이건 우리의 사망 진단서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COP28 의장실에서는 이에 12일(현지시각) 오전 중으로 합의문 초안을 개정해 다시 내놓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