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건축사협회와 건축구조기술사협회가 인천 검단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사고 책임공방에 이어 건축법 개정안을 두고 충돌하고 있다.
검단사고 후속법안으로 발의된 이번 건축법 개정안은 건축구조분야 분리발주를 사실상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건축업계의 해묵은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른 만큼 건축사와 구조기술사 사이 갈등이 더욱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 건축사협회와 건축구조기술사협회가 인천 검단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사고 책임공방에 이어 건축법 개정안을 두고 충돌하고 있다. 사진은 한 건설현장 모습. <연합뉴스>
10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4월 인천 검단아파트 사고 뒤 건축물 구조변경과 안전 규정, 부실공사 책임 강화 등 내용을 담은 건축법 일부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됐다.
이 가운데 강대식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발의한 건축법 일부개정안은 그동안 건축사가 전담했던 건축물 설계, 감리업무에서 건축구조분야 설계와 공사감리 등은 건축구조기술자가 직접 할 수 있도록 분리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개정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건축물의 설계 관련 규정인 건축법 제23조에 건축물의 구조와 관련된 설계는 국가기술자격법에 따른 건축구조기술사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한다.
건축구조분야 분리발주를 법제화하는 셈이다.
현행 건축법에서 건축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건축주와 계약당사자, 공사감리자 등에 건축구조기술사를 추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현행 법체계에서 건축구조기술사의 역할이 건축사에 협조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점을 개선해 건축물 구조안전에 관한 전문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이번 개정안이 통과되면 건축구조기술사는 업무에 있어 권한과 범위가 넓어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건축주와 기술사가 직접 계약하는 분리발주 방식으로 변경은 기술사업계가 계속 주장해온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는 앞서 8월14일 “미국과 일본, 유럽과 같은 선진국은 물론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개발도상국까지 건축과 구조를 분리발주한다”며 “건물 구조설계 품질과 안전 측면에서 국제표준 방식인 건축주가 직접 발주하는 분리발주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건축사단체들은 건축법 개정안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건축사협회와 한국건축가협회, 새건축사협의회, 한국여성건축가협회, 한국건축설계학회 등은 9일 “건축과 구조를 분리발주하면 책임소재가 불명확해지고 건축분야 상호협력시스템의 붕괴가 촉진될 것”이라며반대성명을 발표했다.
박현진 새건축사협의회 부회장은 “이번 법안은 인천 검단사태 대책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한 법안”이라며 “건축물 안전 확보를 위한 대책은 없고 계약관계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건축물 품질과 안전 확보를 위해서는 건축설계를 총괄하는 건축사와 전문 기술사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한데 분리발주를 하게 되면 업무의 효율성이 나빠지고 권한과 책임 범위가 모호해진다고 바라봤다.
건축사단체들은 건축구조기술사 인력 부족 문제도 지적한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2023 국가기술자격 통계연보를 보면 2022년 기준 국내 건축구조기술사 자격 취득자는 1273명이다. 건축구조기술사 자격취득시험은 합격률도 5% 안팎에 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 건축사는 지난해 기준 2만6980명, 건축사 사무소는 1만6천여 개로 집계된다. 이날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23년 제2회 건축사 자격시험 합격예정자는 654명이다.
건축구조기술사는 국가기술자격증의 하나로 건축사의 설계를 토대로 건축물에 가해지는 하중 등을 계산해 건물구조를 설계하는 일을 한다. 대학 건축공학과에서 4년제 학위과정을 마치고 실무경력과 시험을 치른 뒤 자격을 취득한다.
건축사는 건축주의 발주를 받아 건축물을 설계하고 공사를 감리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대학 건축학과에서 5년제 전문학위 과정을 마치고 설계사무소 등에서 4년 이상 실무경력을 갖춰야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건축구조기술사와 건축사는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자격시험 응시조건부터 업무의 범위와 성격에 차이가 있다. 이렇다 보니 기술사와 건축사 사이에서 건축구조 분리발주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갈등이 이어져왔다.
일각에서 이번 건축법 개정안 갈등을 업역 다툼으로 보는 이유다.
▲ 홍건호 건설사고조사위원장(호서대 교수)이 7월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인천 검단 아파트 지하 주차장 붕괴 사고 특별점검 및 위원회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건축사협회와 건축구조기술사협회는 앞서 인천 검단아파트 붕괴사고 원인을 놓고도 책임공방을 벌였다.
대한건축사협회는 7월17일 인천 검단사고 국토부 건설사고조사위원회의 사고조사결과보고서의 ‘설계오류’라는 표현이 건축사 사무소에 책임이 있다는 오해를 불러온다며 사실관계를 명확히 표기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대한건축사협회는 당시 보도자료에서 “검단 현장 구조계산서와 구조도면이 모두 건축구조기술사사무소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구조기술사사무소의 전단보강근 누락 책임을 명확히 기재해야 정확한 대책 마련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건축구조기술사협회는 이틀 뒤인 7월19일 보도자료를 통해 건축사협회가 구조안전 관련 권한은 구조기술사에 일체 주지 않으면서 사고가 발생할 때만 구조기술사를 설계자라고 하면서 책임을 전가한다고 비판했다.
건축구조기술사협회는 건축법이 건축과 관련된 설계 및 감리를 건축사만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법이 건축사가 건축 관련 분야를 대표해 계약하고 하청을 주는 것을 허용해 독점적 지위를 주고 있는 만큼 사고 때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건축구조기술사협회는 이때부터 건축구조 분리발주 필요성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준범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건설산업 주요 유관법률 입법동향(2023년 10월)’ 보고서에서 “건축사와 건축구조기술사 분리발주 의무화법안은 구조기술사 인력확보 등 문제 외에도 건설산업에서 만연한 설계용역의 저가수주 경쟁, 감리 독립성 결여 등 종합적 문제를 고려하지 못했다”고 바라봤다.
이 연구원은 “또 법적 분리발주는 앞서 전기‧정보통신‧소방시설공사 등 분야에서도 전문성과 비효율성 문제 등을 놓고 오랜 다툼이 발생하고 있는 영역”이라며 “이번 개정안도 해당단체를 중심으로 다툼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강대식 의원이 대표발의한 건축법 일부개정안은 9월25일 국회에 의안이 접수됐고 현재 국토교통위원회 심사에 회부된 상태다. 박혜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