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상속이 일어났을 때 디폴트(default) 값이 재산과 빚의 포괄승계가 아니라 한정승인이다. < freepik > |
[비즈니스포스트] 후배가 소송 문제로 상담할 것이 있다면서 사무실에 찾아왔다. 지난주에 소장을 받았다면서 보여준다.
해당 소장에는 후배의 큰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남긴 빚이 후배에게 상속됐고 그 빚을 후배에게 갚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큰아버지가 채무를 남기고 사망하자 그 상속인들은 상속을 포기했고 그 빚이 후배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거쳐 후배에게 상속된 것이다.
후배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큰아버지가 빚을 지고 돌아가신 것에 대해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장을 받고서야 해당 내용을 알 수 있었다. 큰아버지의 자식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지만 연락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가친척 모두가 모여 제사를 지내고 명절을 보내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아버지의 형제라고 하더라도 몇 년째 얼굴도 못 본 경우도 많다. 선대에서 교류가 끊긴 경우 당연히 자식들 간의 교류는 없다. 그래서 친척이 사망해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이 사례와 같은 사안이 많아졌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상속인을 누구로 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다르다. 누가 상속인이 될 것인지 피상속인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제도를 자유상속주의라고 하고 법으로 정해놓는 것을 법정상속주의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법정상속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상속이 일어났을 때의 디폴트(default) 값을 포괄승계로 규정하고 있다. 상속이 일어나면 상속인은 재산뿐만 아니라 빚까지 강제로 승계한다.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일단 상속을 받은 뒤 상속 개시 있음을 안 날부터 3개월 내에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상속은 4순위까지 이루어 질 수 있다. 망인이 채무만 남긴 경우 빚 역시 1순위 상속인 전원이 상속포기를 하면 2순위 상속인에게, 다시 2순위 상속인 전원이 상속포기를 하면 3순위 상속인에게, 3순위 상속인 전원이 상속포기를 하면 4순위 상속인에게 상속된다.
1순위부터 4순위 상속인까지 전원이 상속포기를 해야 상속인이 없으므로 빚은 누구에게도 상속되지 않는다. 그래야 피상속인의 빚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게 된다.
4순위 상속인은 4촌 이내의 방계혈족이다. 돌아가신 분의 4촌 형제가 빚을 승계하는 것은 좀 어이없지 않은가?
내 아버지의 빚이 아버지의 4촌에게까지 넘어가게 하는 것은 분명히 민폐다. 그래서 아버지가 빚을 많이 지고 돌아가신 경우 1순위의 상속인 중 한명이 한정승인을 하고 나머지가 상속포기를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면 빚이 2~4 순위 상속인에게 승계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하라고 상속인에게 강제할 수 없고 상속인도 어떤 사정 때문에 한정승인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필자가 민폐를 끼칠지라도 한정승인보다 상속포기 절차를 진행하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친척이 거의 없어서 4순위 상속인까지 상속포기를 할 사람이 몇 명 안 될 때이다. 이런 경우에는 굳이 복잡한 한정승인을 할 필요가 없다.
모두 같이 상속포기를 신청해 빚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가장 간편하고 깔끔한 해결방법이다. 하지만 가족관계등록부를 꼼꼼히 검토하여 1순위에서 4순위 상속인 중에 빠진 사람이 없이 모두 상속포기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는 한정승인을 할 경우 상속인이 내야 할 세금이 너무 많거나 상속재산에 부동산이 있을 때이다. 피상속인의 재산 중에 부동산이 있으면 한정승인 상속인은 이를 경매 등의 방법으로 매각하여 채권자들에게 분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취득세나 등록세 등 세금이 발생한다. 한정승인을 한 상속인은 상속개시로 인해 자동으로 망인의 상속재산인 부동산을 취득했기 때문에 이러한 세금을 부담한다.
그래서 상속재산에 부동산이 포함되어 있을 때 경매비용, 취득세, 양도소득세 등을 모두 따져본 뒤 한정승인의 신청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세금 액수가 클 경우 번잡스럽더라도 한정승인보다 1순위 상속인부터 4순위 상속인 모두 상속포기를 하는 편이 유리할 수 있다.
셋째는 상속재산 가운데 불법 자동차가 있을 때이다. ‘대포차’라는 것이 있다. 망인의 명의로 등록된 차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누가 운행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이다.
차량을 빨리 찾아 다른 사람에게 명의를 넘기든지 차량을 회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정승인을 한 상속인이라 하더라도 차량이 폐차될 때까지 책임보험료와 자동차세, 각종 과태료까지 떠안아야 할 수도 있다.
특히 그 차량을 운행 중인 운전자가 사고라도 내면 한정승인 상속인이 억울하게 소송에 휘말리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한정승인을 신고한 후 대포차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때까지 소요되는 비용과 수고, 그리고 해결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안하면 친척들의 협조를 받아 관련 상속인 모두가 상속포기신고를 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위와 같은 경우라면 법정상속순위에 있는 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상속포기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친척들에게 알리지 않고 직계가족들만 몰래 상속포기 절차를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머지않아 다음 순위의 상속인들이 망인의 채권자로부터 소장을 받게 된다. 위의 사례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후배는 소장을 받아보고 분노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절차를 제대로 진행해야 한다. 이와 같이 어느 날 친척의 빚을 갚으라는 소장이 날라 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민법은 상속인은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로부터 3개월 내에 단순승인이나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피상속인 사망일이 아니라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이 기준이다. 소장을 받은 후 3개월 내라면 원칙적으로 상속포기나 한정승인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일단 소장에 대해서는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답변서에는 소장을 받고서야 상속인이 된 사실을 알았다는 내용과 상속포기나 한정승인 절차를 진행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으면 된다. 그리고 별개의 절차로 상속포기나 한정승인 절차를 진행한다.
상속포기나 한정승인 신고가 수리되면 그 결정문을 소장을 발송한 법원에 제출하면 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최종적으로 소송이 종료될 때까지는 소송 진행과정을 잘 지켜봐야 한다는 점이다. 필요한 경우 법정에 출석해야 할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상속 빚을 견디다 못한 모녀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의 시간을 놓친 것이다. 이런 불행한 일을 예방할 수 없을까?
근본적으로는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예를 들어 보자, 미국은 상속이 일어난 경우 ‘한정승인’이 원칙이다. 상속이 일어났을 때의 디폴트(default) 값이 재산과 빚의 포괄승계가 아니라 한정승인이다.
한정승인은 물려받은 만큼만 갚으면 되니 빚 때문에 곤란해 질 일은 원칙적으로 차단된다.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이 제도가 도입될 것을 기대해 본다. 고윤기 상속전문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의 전문변호사 등록심사를 통과하고 상속전문변호사로 등록되어 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이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상속과 재산 분할에 관한 많은 사건을 수행했다. 저서로는 '한정승인과 상속포기의 모든 것'(2022, 아템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상속 한정승인 편'(2017, 롤링다이스), '중소기업 CEO가 꼭 알아야 할 법률 이야기(2016, 양문출판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