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일각에서는 윤 대통령이 직접 의대정원 확대 정책을 발표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의대정원 확대는 정치권이 동의하고 국민여론도 우호적이지만 역대 정부에서 실패했던 사안인 만큼 윤 대통령의 개혁 의지를 강조할 수 있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 윤석열 대통령이 10월17일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서울 아덱스(ADEX) 2023' 개막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료계의 거센 반발은 윤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기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7일 국정감사대책회의에서 “의대 정원이 2006년 이후 무려 19년 동안 3058명으로 묶여있는 사이 '응급실 뺑뺑이' 사망사고가 반복되고 지방 의료는 붕괴 위기에 처했다”며 “국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사 수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현재 3058명인 의대 신입생 정원을 2025학년도 입시부터 최소 1천 명 이상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5월에 2025학년도 정원을 3570명으로 현재보다 512명 늘리는 방침을 마련한 바 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의대정원 확대를 향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천 명’ 단위의 정원 확대가 유력시되는 상황이다.
만일 일부 언론 보도 등에서 나온 것처럼 윤 대통령이 직접 국민들 앞에서 의대정원 확대 방안을 설명한다면 그만큼 정책 추진 의지가 강력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대통령이 특정 정책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 확대는 의료계는 물론 향후 교육계와 입시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하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파급력이 막강한 정책 이슈다.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16일 페이스북에 “윤 대통령이 진짜 의대 정원 확대를 실행한다면 역대 정권에서 눈치만 보다가 겁먹고 손도 못 댔던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더군다나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여론도 높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돌파구가 필요한 윤 대통령에게 적합한 개혁의제로 여겨진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9월13일부터 19일까지 전국 20~60대 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의료현안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7.8%가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했다.
김성주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도 이날 국정감사대책회의에서 “모처럼 윤석열 정부가 좋은 정책 발표한다고 하고 여야가 모처럼 한목소리로 찬성하니 정부는 언제든 정책 협의에 나서달라”며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구체적 증원 숫자나 발표 시기·방법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이 가져올 파장이 큰 만큼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것에 부담을 느낄 것이란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
당장 의료계는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에 강경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의협은 이날 전국 의사대표자회의를 개최해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추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이날 회의에는 의협 산하 전국 시·도 16개 의사회장을 비롯해 대한전공의협의회,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단 등이 국내 주요 의사 단체가 참석한다.
의사단체들의 논의 결과나 향후 정부가 발표할 의대 정원 확대 내용에 따라 ‘의료 총파업’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2020년 문재인 정부가 공공의대를 설립하고 의대 정원을 400명 정도 늘리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전공의를 포함한 의사들이 총파업과 집단 휴진을 강행하면서 철회한 바 있다.
▲ 대학병원 전공의들이 2020년 9월 의대정원 확대에 반대하며 시위에 나선 모습. <연합뉴스>
의협 대의원회는 이날 성명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기정사실로 한 보도가 의료계에 경악과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며 “보도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의협은 가용한 모든 수단으로 총력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강조했다.
실제 민주당은 늘어나는 의대 정원이 실질적인 지역의료 및 필수의료 확충으로 이어지기 위해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 설립을 같이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부는 의료계 반발이 커질 것을 우려해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현재 의료계 상황을 고려하면 단순히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지역의료나 필수의료를 확충하기 어려워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의대 정원 발표에 앞서 외과, 소아과 등 필수의료나 기피과에 대한 수가 개선 등 정부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했던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지방의대 정원을 늘려준다 하더라도 지방에서 졸업하신 분들의 상당수가 서울로 다 올라온다”며 “정원 확대만으로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고 바라봤다.
서울에서 소아과를 운영하고 있는 한 의사는 "1천 명을 늘리던, 1만 명을 늘리던 젊은 의대생들이 필수과나 기피과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며 "수가체계 개선 등이 없이 의대정원만 늘리면 결국 성형과 피부미용 병원만 늘리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대 정원을 얼마나 늘려야 할지 과학적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현영 의원은 이날 ‘보건의료인력 수급 추계 지원위원회 설치법’을 발의했다.
신 의원은 “필수의료 붕괴와 의료취약지 인프라 격차 문제 개선은 정치적 판단이 아닌 정책적 근거하에 조정된 의사정원을 통해 완성시킬 수 있다”며 “전문가 위원회를 통해 의대 정원 확충이 필요할 땐 늘리고 감축이 필요할 땐 줄이는 기전을 마련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해외사례를 살펴볼 때 의대정원 확대가 부작용을 일으킨 경우도 적지 않다. 정부가 정책 발표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안덕선 고려대학교 의대 명예교수는 6월16일 대한의학회 학술대회에서 의사 수를 급격히 늘렸던 외국 사례의 문제점을 발표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그리스는 의사들의 특정과 쏠림 현상, 지방 근무 기피 현상이 심해 의사 수를 늘렸고 그 결과 2007년 인구 1천 명당 5.31명이었던 의사 수가 2019년 기준 6.31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의사 수가 늘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무려 1만7500여 명의 의사들이 열악한 그리스 의료 환경에서 일하지 않고 해외로 나갔기 때문이다.
일본도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진료과목 의료기관의 폐쇄 증가를 이유로 2008년 7793명이었던 의대 정원을 2019년 9420명까지 늘렸다.
그러나 의사가 과잉 공급되면서 의료서비스 총량이 늘자 보험재정 지출 부담이 커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2020년 7월 2022년부터 의대 정원을 감축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며 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날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의사인력 전문위원회 모두발언에서 "의사 수 증원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의사 수 부족도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인 만큼 인력 확충과 함께 추진할 정책 패키지 논의를 위해 구체적이고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달라"고 말했다. 김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