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차그룹은 하반기 미국에 출시하는 유일한 전기차 신차인 EV9를 앞세워 현지 전기차 점유율 방어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현대자동차그룹이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으로 1천만 원 가까운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못 받는 상황에서도 인센티브를 공격적으로 지급하며 올해 상반기 미국 전기차 판매량 2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아직 선택지가 많지 않는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는 전기차 신차를 출시한 브랜드들이 점유율을 크게 높여나가고 있다. 특히 현대차그룹과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GM은 올해 하반기 전기차 신차를 잇달아 내놓는다.
현대차그룹은 하반기 미국에 출시하는 유일한 전기차 신차인 EV9를 앞세워 미국 현지 전기차 점유율 방어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30일 미국 시장조사업체 모터인텔리전스가 집계한 미국 상반기(1~6월) 전기차 판매량 집계를 종합하면 올해 상반기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점입가경'의 판매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상반기 3만8457대로 미국 전기차 판매량 2위에 오른 가운데 지난해 미국 전기차 연간 판매 순위에서 0.5% 박빙의 차이로 현대차그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던 포드는(2만5709대) 5위로 미끄러졌다
반면 지난해 4위였던 제너럴모터스(GM)는 값싼 볼트EV 판매 호조에 힘입어 3위(3만6322대)로 올라섰다. 4위는 2만6538대를 판매한 폭스바겐이 차지했고 테슬라는 33만6892대를 판매해 압도적 선두 자리를 꿰찼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상반기 전기차 신차를 출시한 브랜드들이 판매량을 폭발적으로 늘렸다는 점이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2022년 상반기 EQS 단 1종의 전기차를 판매했던 메르세데스-벤츠는 올해 상반기 EQB, EQE, EQS SUV, EQE SUV 등 전기차 라인업을 5종으로 확대한 데 힘입어 전기차 판매량이 470%(2만3071대)나 급증했다.
토요타그룹은 지난해 품질문제로 리콜됐던 Bz4X를 올해 1월 재출시하고 렉서스 전기차 모델을 투입하면서 같은 기간 전기차 판매량이 20배 넘게 늘어난 4776대를 기록했다.
미국 전기차 시장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지난해 기준 전체 승용차 판매량 가운데 전기차가 차지한 비중은 5.8%로 한국 9.9%, 유럽 14%에 한참 못미친다.
미국 전기차 시장이 아직 개화기를 지나고 있는 만큼 각 완성차업체가 전기차 신차를 내놓으면 현지 전기차 시장 전체가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판매량도 전기차 신차 출시 여부에 따라 큰 영향을 받고 있다.
현대차는 올해 상반기 아이오닉6를 전기차 라인업에 추가하며 IRA 시행 전인 2022년 상반기와 비교해 미국 전기차 판매를 50%가량 늘렸다.
반면 미국에서 전기차 신차 출시가 없었던 기아는 올 상반기 판매량이 1년 전보다 29.8% 줄어들었다. 지난해 기아는 EV6과 신형 니로EV를 미국에 출시해 2021년보다 전기차 판매량을 406%나 늘린 바 있다.
지난해 8월 시행된 IRA는 북미에서 최종조립된 전기차에 한해 최대 7500달러(약 960만 원)의 전기차 구매 보조금(세액공제)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아직 미국에 전기차 생산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모델들은 모두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미국 전기차 판매 톱5 가운데 홀로 전기차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서도 올해 상반기 현지 판매 2위에 올랐다. 이는 현대차그룹의 인센티브 전략에 따른 효과로 분석된다.
현대차그룹은 IRA에 관계없이 전기차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리스와 플릿(자동차를 법인, 렌터카, 중고차업체 등 대상으로 대량 판매하는 것) 등 상업용 판매 채널을 늘렸다.
또 전기차 모델에 따라 IRA 보조금(7500달러)에 필적하는 수준의 자체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수익성보다는 판매대수를 늘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문제는 하반기부터다.
현대차그룹이 하반기 미국에 출시하는 기존에 없던 전기차 신차는 EV9뿐이다.
반면 올해 상반기 미국 전기차 판매량에서 현대차그룹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GM은 하반기 이쿼녹스EV, 블레이저EV, 실버라도EV 등 인기 내연기관 모델의 전기차 버전 신차 3종을 미국에 출시한다.
이에 현대차그룹은 하반기 미국 전기차 판매 인센티브 규모를 더욱 확대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인센티브 지급을 위한 이익체력은 충분하다.
현대차와 기아는 올해 1분기에 이어 2분기에도 분기기준 역대 최대 영업이익 기록을 새로 썼다.
현대차와 기아의 올해 2분기 합산 영업이익 7조6409억 원으로 영업이익률은 현대차 10%, 기아 13%에 달한다. 이는 글로벌 1위 전기차업체 테슬라(9.6%)를 넘어서는 수치다.
반면 올해 현대차그룹의 미국 전기차 판매실적은 기존 목표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올해 연간 미국 전기차 판매 목표와 비교해 상반기 실제 판매량은 현대차가 34%, 기아가 31% 수준에 그친다.
신윤철 키움증권 연구원은 "현대차와 기아가 단기적 전기차 판매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매년 인베스터 데이를 통해 상향 제시하고 있는 중장기 전동화 전략에 대한 신뢰도가 갈수록 희석될 것"이라며 "두 회사는 2분기 영업이익 운신의 폭을 적극 활용해 전기차 판촉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더욱이 현대차그룹이 IRA에 대응하는 과정에 올해 6월 50%까지 치솟은 상업용 판매 비중을 애초 목표치인 30% 수준으로 낮춰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이를 위해서도 인센티브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다.
플릿 판매는 개인 고객이 아닌 법인, 렌터카 등을 대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일반 소매 판매와 비교해 '제값받기'가 힘들 뿐더러 중고차 시장에 차량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브랜드 가치를 깎아 먹을 수 있다.
전기차 플릿 판매를 줄이면서도 기존 판매실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매판매로 전환하면서 미국 전기차 보조금을 못받게 되는 물량에 상당한 수준의 인센티브를 지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3분기 안에 EV9 미국 수출 물량 양산을 시작하고 4분기부터 본격 판매에 돌입한다.
기아는 미국에서 EV9를 출시하고 현지에서 단단한 수요를 확보하는 데 전사적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EV9는 상업용이 아닌 일반 소매 판매로 할인을 제공하지 않아도 상당한 판매실적을 올릴 수 있는 차종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현재 EV9와 같은 3열 전기 SUV는 선택지가 넓지 않은 데다 그나마 있는 현지 시판 모델 대부분이 IRA가 규정한 SUV 보조금 지급 가격 상한인 8만 달러를 훌쩍 넘는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최근 미국 자동차 전문 평가기관 켈리블루북(KBB)은 미국에 판매될 EV9 시작가격을 5만5천 달러(약 7천만 원), 모든 옵션을 다 넣으면 7만 달러(약 8950만 원) 수준이 될 것으로 관측했다.
반면 테슬라 모델X에는 9만8490달러(1억2600만 원), 메르세데스-벤츠 EQS SUV에는 11만 달러가 넘어서는 가격표가 붙었다.
메르세데스-벤츠 EQE SUV와 리비안 R1S 기본모델의 가격은 각각 7만7900달러, 7만8천 달러로 일부 모델은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고려해도 실제 구매 가격이 EV9 풀옵션 가격을 넘어선다.
현대차그룹은 조지아주 전기차전용 공장이 완공되는 2024년 하반기부터 IRA에 따른 전기차 구매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전기차 모델이 차츰 늘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우정 기아 재경본부장 부사장은 27일 열린 2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전기차 가격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전기차 시장이 도입기를 지나 대중화 시대로 들어가면서 전기차 경쟁이 심화하고 있다"며 "앞으로 이렇게 비정상적 격화된 시장에서는 수익성이 양보되는 한이 있더라도 시장점유율을 지키는데 무게를 두고 이 비정상적 시점을 정면 돌파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