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열 총재가 최경환 부총리 등장 이후 흔들리고 있다.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흔들리고 있다. 금리조정 시그널을 놓고 이 총재 스스로 한 말이 바뀔 정도다.
이 총재의 이런 모습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등장 이후 두드러졌다. 인사청문회를 거쳐 한은 총재에 오를 때나 취임 초 김중수 전 총재와 선 긋기를 할 때의 모습과 다르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 최 부총리와 밀월관계를 예고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이 총재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은 커지고 있다.
이 총재가 인사청문회를 거쳐 한은 총재를 맡았을 때 시장의 기대는 컸다. 이 총재는 ‘소신’의 상징이었고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총재는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시절 부총재로 재임하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아 김 전 총재와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이 총재는 2012년 한은을 떠나면서 “60년에 걸쳐 형성된 고유의 가치와 규범이 하루아침에 부정됐다”며 “한은이 리더와 구성원 간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의 변화를 모색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이 총재는 취임 후 인사를 통해 김 전 총재와 선긋기에 나섰다. 김 전 총재 측근을 대부분 외곽으로 내 보낸 뒤 자신과 가까운 인사를 중용했다. 이를 두고 김 전 총재와 똑같이 친정체제 구축에 나섰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김중수 전 총재에 의한 ‘인사파행’을 바로잡는 차원이 적지 않아 일정하게 수용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총재의 소신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들이 늘어났다. 금리만 놓고 봐도 이 총재의 태도가 오락가락해 시장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 총재는 지난 5월 “정책금리가 오를지 내릴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중앙은행이 시장과 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구체적 금리조정시기를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방향은 시장에서 짐작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금리 방향을 놓고 시장의 예측이 엇갈리고 있다. 이 총재 스스로 공언한 것처럼 시장과 소통에 문제가 생긴 셈이다.
더욱이 이 총재는 스스로 했던 말을 번복하기도 했다. 이 총재는 금리조정 시그널을 적어도 3개월 전에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급하게 변하면 한두 달 만에 금리를 조정할 수도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이렇다 보니 이 총재가 시장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총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등장한 시기와 겹친다. 최 부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이자 여권의 실세 중 한 명이다. 최 부총리가 강력한 성장 드라이브를 예고하자 이 총재는 슬그머니 금리인하 쪽으로 통화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왼쪽)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1일 조찬회동에서 현재 경제상황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뉴시스>
◆ 이주열과 최경환, 밀월을 예고하나
이주열 총재와 최경환 부총리는 21일 오전 조찬회동을 했다. 금리변동 가능성이 점쳐지는 시점의 만남이라 금융시장의 이목이 집중됐다. 최 부총리가 부총리 취임 이후 공식적으로 다른 기관장을 만난 것은 이 총재가 처음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금리에 관한 논의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 부총리는 “금리인하의 금자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금리는 한은의 고유권한”이라고 말했다.
금리인하는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경기부양책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다. 최 부총리가 경기부양과 경제성장을 선언하고 나선 만큼 한은에 은근히 정책협조 압력을 넣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 총재는 최 부총리가 내정된 뒤 “(최 부총리와) 개인적 인연은 없다”며 “서로의 역할존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최 부총리는 이날 만남 이후 “이 총재가 학교선배”라고 개인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앞으로 전화 등 수시로 연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부총재도 이날 회동 뒤 “최 부총리와 경제를 보는 인식이 큰 차이가 없다”며 “경제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총재의 이런 발언을 두고 금리인하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최 부총리는 “금리는 한은의 고유권한”이라는 원론적 발언을 통해 이 총재에게 힘을 실어주고 이 총재로부터 “경제 인식을 같이 하겠다”는 실리를 받아냈다는 해석도 나왔다.
그 실리는 다름아닌 최 부총리가 원하는 금리인하다. 금융시장은 두 사람의 조찬회동 이후 금리인하 기조가 확실해졌으며 0.25%포인트 인하냐, 0.5%포인트 인하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권구훈 골드만삭스 한국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이날 보고서를 통해 “3분기중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낮출 것”이라며 “인하시점이 다음 달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골드만삭스의 기존 전망은 연내 기준금리 동결이었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두 사람의 회동 뒤 공동 발표문에서 “최 부총리와 이 총재가 우리경제는 세월호 사고 영향으로 경기회복세가 둔화되면서 내수부진 등 하방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두 기관은 또 “내수와 수출, 기업소득과 가계소득간 불균형 등 우리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우려를 함께 했다”며 “경제가 안정적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재정 등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의 조화를 이뤄 나간다는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 흔들리는 이주열 “시그널을 시장이 오해했다”
이 총재는 취임 후 첫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경기회복세가 지속돼 물가안정을 저해하면 선제적으로 금리인상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단을 만난 자리에서도 “지금 시장에서 금리인하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언급했다. 사실상 인상쪽으로 금리조정 신호를 내보낸 것이다.
이 총재는 세월호 참사가 터져 내수경기가 위축되기 시작한 5월 금통위에서도 금리인상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 총재는 “지금 금리는 경기회복을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서 “이런 경기 흐름에서 방향을 금리인상 쪽으로 상정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총재와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기조는 6월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내정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 부총리는 인사청문회에서부터 강력한 성장 드라이브를 예고했다. 이전부터 최 부총리는 “경제가 나빠지는데 금리를 동결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금리인하를 주장했다.
그러자 이 총재는 “4% 성장이 가능했던 4월과 경제여건이 달라졌다”며 “(금리인상 기조를)그대로 끌고 가야할지 확신이 안 선다”며 인상기조를 완화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 총재가 성장론자인 최 부총리의 목소리에 맞췄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 총재가 금리인상 기조를 완화한 후 지난 10일 열린 7월 금통위에서도 금리는 동결됐지만 13개월째 이어진 ‘만장일치’가 깨졌다. 한 명의 금통위원이 금리동결이 아닌 다른 의견을 낸 것이다. 이 총재는 이 의견이 인상인지 인하인지 답하지 않고 “의사록을 참조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의견은 ‘금리인하’일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총재는 7월 금통위를 마치고 “세월호로 위축된 소비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며 “하방 리스크가 커진 것”이라고 언급했다. ‘하방 리스크’는 최 부총리도 반복해서 지적한 것으로 경제성장에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의미다. 경제성장이 예측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졌다.
그런데 이 총재는 최근 또 다시 금리인하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해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총재는 지난 16일 “금리인하가 반드시 소비에 도움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금리인하는 가계부채를 늘릴 수 있다”며 “지금 상황에서 가계부채를 늘리는 것은 냉정하게 따져 봐야 할 것”이라고 금리인하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발언을 했다.
▲ 흔들리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말에 시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뉴시스>
◆ 이주열에 대한 시장의 우려
시장은 한국은행의 금리정책에 대해 의문부호를 떼지 못하고 있다. 이 총재는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소통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그렇지 못했다”며 “4월 금통위도 금리인상 시그널이 아니었는데 시장이 그렇게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단순히 경제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라 과거 발언을 시장이 잘못 해석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총재는 비교적 명확하게 신호를 주며 시장의 기대와 발을 맞춰갔지만 6월부터 또 틀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최 부총리의 등장이 있다. 이 총재 이상으로 언론에 많이 노출되고 정관계 안팎으로 영향력이 큰 최 부총리가 경제부총리로 내정되자 금융당국도 급속히 방향선회에 나섰다.
신제윤 금융위원장과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애초 부동산 규제와 관련해 부동산 경기를 활성화하기보다 가계부채를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최 부총리가 총부채상환비율(DTI)과 담보인정비율(LTV) 완화를 주장하자 말이 달라졌다. 신 위원장은 “금융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실무지원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고 최 원장도 “합리적 개선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며 DTI와 LTV에 손을 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여기에 이 총재까지 최 부총리와 발맞추기에 나섰다. 금리 관련은 물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경제인식에 큰 차이 없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 부총리가 경제성장을 들고 나온 만큼 이 총재가 경제인식을 같이 한다면 금리인상이 어렵다.
문제는 이 총재가 소신을 잃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시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이 총재의 일관성 없는 발언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성인 홍익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한은이 말을 바꾸는 사례가 많아지면 시장의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은의 독립성에 대한 염려도 있다. 권영준 경희대학교 국제경영학부 교수는 “시장이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을 주시하고 있는데 자칫하다 중앙은행이 존재감을 잃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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