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솔 기자 limhs@businesspost.co.kr2023-07-03 1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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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충남 청양군 학당리 인근에서 탐조 유튜버 '새덕후(앞쪽)'가 투명 방음벽에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비즈니스포스트] 바이오기업 HLB(에이치엘비)와 ‘새튜버’가 만났다. 투명 유리에 부딪쳐 하루 2만 마리 꼴로 죽어가는 새들을 구하기 위해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이 선한 영향력과 결합해 생명을 살리는 현장에 직접 가봤다.
◆ 새를 살리는 공식 ‘5×10’
2일 오전 9시를 조금 넘은 시각, 충남 청양군 학당리 인근의 한적한 도로에 버스 한 대가 멈추고 승객 40여 명이 내렸다. HLB의 지원을 받아 조류 충돌 방지 봉사활동에 나선 탐조 유튜버 ‘새덕후’와 구독자들이다. 국립생태원과 이화여대 동아리 윈도우스트라이크모니터링, HLB 관계자들도 동참했다.
그들 앞에는 도로를 따라 성인 키 높이 방음벽이 300~400m 길이로 설치돼 있었다. 방음벽을 이룬 판재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고 투명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날 작업은 방음벽을 더 이상 투명하지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방음벽 아래에서 발견됐다. 인도 위에 드문드문 죽은 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박새, 참새, 오목눈이 등 6마리. 모두 투명한 방음벽에 부딪쳐 으스러졌다.
▲ 2일 방음벽 인근에서 발견된 죽은 새들. <비즈니스포스트>
실제로 죽은 새는 6마리뿐이 아니다. 방음벽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새도 항상 날아다니니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죽음은 훨씬 많을 게 분명했다. 이전 조사에 따르면 유리창 충돌로 죽는 새는 하루 2만 마리, 연간 800만 마리에 이른다.
새덕후는 “여기서 지금까지 보고된 조류 충돌 사례만 70여 건이다”며 “유리창은 24시간 가동되는 새 살상 덫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런 사고를 막으려면 ‘5×10’ 규칙이 필요하다. 위아래 5㎝, 좌우 10㎝ 이하 간격으로 촘촘한 무늬를 그려 새들이 유리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인식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맹금류 그림 같은 것은 효과가 없다.
이번 작업에서는 방음벽에 5×10㎝ 간격으로 작은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이 선택됐다. 방음벽을 먼저 물로 닦아낸 뒤 일정 간격으로 점을 찍고 그 점에 맞춰 차례대로 테이프를 붙인다. 그리고 테이프를 떼어내면 테이프에 부착돼 있던 스티커만 방음벽 위에 남게 된다.
▲ 2일 새덕후 구독자들이 투명 방음벽에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를 부착하기 위해 밑작업을 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작업 과정을 설명한 진세림 국립생태원 동물복지부 계장은 “5×10 규칙으로 스티커를 붙인 뒤 조류 충돌이 90% 이상 저감되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덧붙였다.
말로는 쉽지만 여름철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단순작업을 이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그늘 하나 없는 도로 위에서 일하는 구독자들의 이마에는 금새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평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요령은 다소 서툴러도 모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사는 곳과 직업, 나이와 성별은 달라도 새덕후와 함께 새들을 살리는 데 기여하고픈 마음은 같다고 입을 모았다.
▲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를 붙이기 전(왼쪽)과 후 비교. <비즈니스포스트>
대학원생 조지은씨는 “평소 새 관련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기회가 많지 않아 이번 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며 “스티커를 붙이면 조류 충돌을 90% 이상 줄일 수 있다고 하니까 보람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남편과 딸을 데려온 김도희씨는 “새덕후가 이전에 올린 조류 충돌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딸에게 좋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나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 어머니를 따라 봉사활동을 갔다”고 말했다.
결국 몇 시간이 지나 마침내 방음벽 전체가 스티커로 촘촘하게 덮였다. 새덕후 구독자들은 지친 가운데에도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이 곳에서는 더 이상 새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 (왼쪽부터)임태훈 HLB ESG경영팀장 차장, 새덕후, 김정석 HLB ESG경영팀 대리가 2일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 부착을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HLB와 새덕후 조합, 왜?
새덕후는 현재 구독자 약 44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로 조류 관찰 영상을 전문적으로 업로드한다. 국내 탐조 유튜버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전부터 조류를 비롯한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조류 충돌 방지, 야생동물 구조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다만 40명 넘는 대규모 인원이 참석하는 봉사활동을 계획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행사는 또 HLB의 첫 번째 생물다양성 캠페인이기도 하다.
새덕후는 이전부터 방음벽에 대한 충돌 방지 조치를 하고 싶던 차에 HLB가 예산을 지원해 이번 행사가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HLB 쪽에서 먼저 협업을 제안했다고 한다.
새덕후는 “충돌 방지 스티커가 비싸 개인으로 활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스티커를 붙이고 싶은 나와 ESG경영을 강화하고자 하는 HLB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고 말했다.
HLB는 항암제 ‘리보세라닙’을 포함해 다양한 항암 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기업이다. 다른 대부분의 기업이 그렇듯 조류와는 직접적으로 별 관계가 없다. 하지만 환경 보호라는 큰 틀에서 ESG경영을 본격화한다는 의미로 새덕후와 협업에 나선 것이다.
현장에 함께한 임태훈 HLB ESG경영팀장 차장은 “최근 다양한 연구결과를 통해 생물다양성 손실이 금융안정성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ESG 공시기준에 생물다양성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HLB는 타사 대비 탄소배출이나 생태계 파괴에 대한 피해가 크지 않지만 ESG 선도기업으로서 최근 그룹 차원의 생물다양성 캠페인으로 야생조류 충돌방지를 위한 저감활동을 실시했다”고 말했다.
▲ 2일 조류 충돌 방지 스티커 부착을 마친 새덕후 구독자 및 HLB, 국립생태원, 이화여대 윈도우스트라이크모니터링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HLB는 2021년 4월 ESG경영팀을 꾸린 뒤 전사적으로 지속가능경영을 추진하고 있다. HLB그룹 각 계열사에서 개별적으로 ESG경영을 모색하되 HLB ESG경영팀이 중심에서 조율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8월에는 처음으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최근 세계적으로 기업의 친환경과 경영 투명성을 강조하는 추세가 정착되면서 ESG경영이 기업 경쟁력을 평가하는 지표 중 하나로 자리잡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HLB그룹이 진출을 노리는 미국은 특히 ESG경영을 중시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HLB는 미국에서 리보세라닙 병용요법을 간암 1차 치료제로 허가받기 위한 신약허가신청을 5월 제출했다.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