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가 3월31일 서울 남산스퀘어 사무실에서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2023년 3월 주주총회 시즌이 끝이 났다. 이번 3월은 그 어느 해보다 이슈가 많았던 주총 시즌으로 평가된다.
경영 공백 사태가 벌어진 KT, 관치금융 논란 속에서 새 리더십을 맞은 주요 금융지주 등 '주인 없는' 회사의 주총에서는 지배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KT&G 주총 등 특정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도 거셌다.
국내 최초 의결권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를 이끄는 류영재 대표는 이번 주총 시즌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KT 주총이 열린 3월31일 서울 남산스퀘어 서스틴베스트 본사에서 직접 류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민간기업 CEO 선임 과정이 흔들린 KT 사태, 코리아 디스카운트 심화로 이어져
“자본시장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류 대표는 KT 주총을 한 마디로 이렇게 평가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정해진 CEO 후보가 사퇴하고 사외이사 다수가 물러나 경영 공백을 맺은 KT의 상황이 개별회사뿐 아니라 국내 자본시장을 향한 신뢰를 크게 해쳤다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민간회사의 CEO는 민간이 정하고 주총을 통해 결정된다. 그런데 KT는 회사가 정해놓은 적법한 절차대로 선정된 최종 후보가 주총 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퇴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외압이 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는 KT가 3월 주총을 앞두고
구현모 전 KT 사장이 물러나고 다음 회장 최종 후보로 내정된
윤경림 후보가 사퇴한 배경으로 새 정부의 보이지 않는 외압을 꼽고 있는데 이와 결을 함께 한 셈이다.
류 대표는 “CEO는 기업의 지배구조 측면뿐 아니라 기업가치를 형성하는 데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며 “정부는 이미 20여 년 전에 지분을 모두 매각해 KT를 완전 민영화했다. KT는 현재 외국인투자자의 지분이 40%를 넘는데 이번 사태는 외국인투자자의 신뢰 약화로 이어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KT 사태가 국민연금공단의 스튜어드십코드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비판했다.
류 대표는 “국민연금은 2015년 삼성물산 제일모직 사태를 겪고 나서 주요 의결권 사안에 대해서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거치도록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했는데 이번 사안은 공단 이사장이 이런 내부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고 구두로 KT 지배구조 문제를 언급하며 사실상 시그널을 줬다”고 주장했다.
국민연금이 제대로 된 스튜어드십코드를 운영하기 위해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의 구성원의 전문성과 회의의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바라봤다.
류 대표는 “현재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들을 보면 법조인, 연구원, 회계사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기금 운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이들이 위원으로 포함돼야 한다”며 “회의 내용도 금융통화위원회처럼 투명하게 공개해야 위원회의 객관성이 높아질 것이다”고 조언했다.
◆ ISS 결정이 절대적인 주총 안건 표심, 독립적 의결권자문사 길러야
국내 주요 상장사의 주총 안건 표결이 글로벌 의결권자문사 ISS(인스티튜셔널셰어홀더서비스)에 종속돼 있다는 점은 국내 상장사 주총의 고질적 문제로 꼽혔다.
외국계 주요 기금들은 대부분 ISS의 결정에 따라 주총 안건에 대한 찬반 의견을 정하는데 국내 상장사 안건 분석의 경우 ISS의 결정에 전문성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류 대표는 “ISS는 주총 안건과 관련해 이런 저런 팩트를 넣으면 결과를 산출해주는 시스템을 통해 찬성과 반대 의견을 결정하는데 주총 시즌이 되면 한국 대학생 십여 명을 인턴으로 고용해 국내 주요 상장사를 대상으로 두부 찍듯이 이 작업을 하고 있다”며 “전문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서스틴베스트가 이번 의안분석을 할 때 25명이 3개월을 진행해 250개 기업 관련 보고서를 냈다. 2중 3중으로 사실 점검을 하다 보면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며 “ISS는 주총 시즌 열 몇 명의 학생들이 1천 개 가까운 국내기업 정보를 수집해 주총 의안을 분석하는데 오류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 2013년 3월 주총에서는 KB금융의 ISS 보고서에서 사실 확인이 잘못된 오류가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류 대표는 “국내 자본시장이 주주권 행사 측면에서는 ISS에 식민화됐다”고 표현할 정도로 ISS 결정에 종속된 현재 주총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CEO 선임은 물론 주요 합병, 정관 개정, 재무제표 승인 등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모두 주총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주총의 안건 표결이 ISS의 결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해결책으로는 독립된 국내 의결권자문사 육성을 들었다.
류 대표는 “ISS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아니라 민간 의결권자문사의 하나일 뿐이다”며 “외국인투자자들은 ISS 의견을 따르고 싶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안건을 분석하고 근거를 만들 물리적 시간이 부족해 ISS 의견을 따를 때가 많다. 외국인투자자에게 다른 대안과 근거를 제시해줄 독립적 의결권자문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투자자가 일본 기업에 투자할 때 노무라증권의 분석을 비중 있게 참고하는 것처럼 국내 상장사는 국내 자문사가 더 심도 있게 분석할 수 있다”며 “금융당국이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국내 의결권 자문업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행동주의 펀드 확대는 장기투자 관점에서 긍정적 요소
이번 주총 시즌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늘어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류 대표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부패하는 것처럼 견제 받지 않는 기업경영 역시 부패할 가능성이 높다”며 “투자자가 딴 짓을 하면 기업도 딴 짓을 하게 되는데 행동주의 펀드가 늘어나면 기업이 딴 짓을 할 확률을 줄일 수 있다”고 바라봤다.
행동주의 펀드가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경영에 관여해 주주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흐름이 결국 국내 투자 문화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류 대표는 “워런 버핏은 주주를 ‘셰어홀더’라고 부르지 않고 ‘셰어오너’라고 부르고 무덤까지 가져갈 주식을 골라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장기투자 전략을 쓴다”며 “우리도 단순히 샀다 팔았다 하는 트레이딩 방식의 단기 투자가 아닌 주주로서 기업과 함께 성장하는 투자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기투자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국민연금공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도 바라봤다.
류 대표는 “장기투자는 결국 재무적 성과뿐 아니라 비재무적 성과까지 함께 고려하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투자와 연결되는데 국내에서는 위탁운용을 주는 ‘에셋 오너’인 국민연금이 바뀌어야 한다”며 “국민연금이 바뀌면 다른 국내 기금들도 위탁운용을 받기 위해 바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ESG 투자 길 안내하는 서스틴베스트 설립 17년, 아직도 갈 길 멀다
류 대표는 국내를 대표하는 ESG 투자 전문가로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수준을 평가분석하는 서스틴베스트를 2006년 설립해 지금껏 운영하고 있다.
문재인정부에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투자 및 경제분야에 관심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1960년생인 류 대표는 한양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으로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애초 기자를 꿈꿨으나 군대 제대 후 집안사정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당시 처우가 가장 좋다는 증권사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류 대표는 “14년 동안 증권사에서 기획, 조사, 영업 등의 일을 했는데 적성에도 맞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생활을 보냈다”며 “하지만 남한테 지는 걸 싫어해 열심히 일했고 그러던 중 새로운 투자 기법 등을 배우기 위해 2000년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고 돌아봤다.
그는 영국 애슈리지경영대학원에서 파이낸스로 석사학위(MBA)를 땄는데 여기서 만난 사회책임투자(SRI)가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류 대표는 “영국에서 만난 사회책임투자는 그동안 증권사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과 달랐다”며 “기업이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지, ‘똑똑한 바보’처럼 형용모순처럼 느껴지면서 호기심이 일었다”고 말했다.
사회책임투자가 가치와 수익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점에서 대학시절 공부한 ‘정치외교학’과 그동안 경력을 쌓아 온 ‘증권업’의 하이브리드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 생각은 결국 증권사 퇴사와 서스틴베스트 설립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ESG 투자라고 불리는 사회책임투자와 관련한 평가, 분석, 자문을 수행하는 서스틴베스트를 설립한 지 17년. 류 대표는 지금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과거 순간순간을 보면 너무나 더디게 바뀌어 힘들 때가 많았지만 2006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많이 변했다. 하지만 정부와 기업들이 약속한 2050년 넷제로,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등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아직 많다.”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