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사실상 이재용체제로 전환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삼성의 얼굴’을 넘어 삼성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얼마 전 영업이익 7조 원대의 2분기 잠정실적을 내놓았다. 위기라는 진단이 나왔고 이재용체제의 미래를 놓고 시선이 집중됐다.
이재용체제, 삼성은 어디로 갈까?
몇 차례에 나눠 이재용체제를 긴급히 진단해 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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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4일 서울대학교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열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강을 듣고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뉴시스> |
삼성전자라는 거인이 위기다. 삼성의 이재용체제는 이 위기를 앞에 두고 출발선에 서있다.
삼성전자의 분기 8조 원 영업이익 신화가 무너졌다. 메모리에 이어 삼성전자의 신화를 썼던 스마트폰시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스마트폰 정체를 타개할 성장동력으로 태블릿PC를 지목했는데 이 또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삼성의 전략이 그리 영리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FT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삼성전자가 2012년 내놓은 갤럭시S3가 마지막 혁신제품”이라며 새로운 혁신제품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한마디로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이후’를 놓고 뚜렷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삼성전자의 위기는 ‘스마트폰 다음에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데 있다.
'2030 대담한 미래'라는 책을 쓴 미래학자 최윤식 한국뉴욕주립대 미래연구원장은 삼성전자가 ‘알렉산더 딜레마’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알렉산더 대왕처럼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한 후 군대를 쉬게 할지 아니면 새로운 전쟁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고 염려했다.
삼성전자의 오늘을 만들어준 스마트폰시장에서 ‘영리한 전략’을 쓰든지, 아니면 새로운 시장을 향해 달려가든지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그 다음’을 찾는 일은 이재용체제의 안착과 직결돼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그동안 경영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따라서 이재용체제로 전환하는 명분은 결국 삼성전자의 실적일 수밖에 없다. 당장의 실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삼성전자가 가야할 좌표만큼은 명확히 제시해 보여줘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은 아버지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오래 전부터 사실상 삼성전자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삼성전자의 미래를 찾는 일에도 깊이 관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체제에 이 부회장은 메모리반도체와 휴대폰 같은 '이건희 사업'을 넘어 삼성전자의 내일을 이끌 '이재용 사업'을 찾아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가 갈 방향을 제시하고 삼성전자의 역량을 그 방향으로 집중해야 한다.
이 부회장은 어떤 사업을 향해 거대 삼성전자를 이끌고 갈까?
◆ 하드웨어의 우위, 시스템 반도체에서 살릴까
삼성전자는 누가 뭐래도 하드웨어에 강점을 지닌 글로벌기업이다.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에서 신화를 쓴 것도 하드웨어가 뒷받침이 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그룹이 지난해 말부터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전자 부문의 계열사들을 대상으로 합병을 통해 사업구조를 재편한 것도 하드웨어의 강점을 더욱 살리기 위한 전략이다.
박강호 대신증권 연구위원은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삼성의 강점은 수직계열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라인업을 구축할 수 있는 힘에 있다”며 “하드웨어 기술 강점을 잘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실적부진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이런 하드웨어 우위를 더욱 굳히게 된다면 스마트폰 이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전까지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다는 얘기인 것이다.
삼성전자는 그 길을 시스템 반도체에서 찾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에 반도체 부문에서 2 조원을 넘는 영업이익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영업이익률도 20%를 넘기면서 스마트폰이 포함된 모바일 부문을 따라잡았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분야에서 점유율 34%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시장점유율 5.3%로 인텔(20.3%)과 퀄컴(5.8%)에 이어 3위에 그치고 있다.
반도체시장 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326조 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시스템 반도체가 시장의 80%를 차지한다. 앞으로 연간 5% 이상 성장하는 등 견고한 성장도 예상된다.
사람의 두뇌로 치자면 시스템 반도체는 계산을 하는 부분이고 메모리 반도체는 기억을 담아두는 부분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컴퓨터의 CPU가 대표적인데 ‘스마트폰의 두뇌’라고도 불릴 정도로 대부분의 전자기기에서 쓰인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10년 전까지도 세계 시스템 반도체시장에서 순위권에도 들지 못했지만 이제 매출 기준 3위까지 성장했다”며 “삼성전자가 지닌 융복합 기술을 적극 활용해 시스템 반도체사업을 메모리 반도체처럼 세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그동안 실적이 부진했던 시스템반도체 담당 사장을 물러나게 하고 메모리반도체를 담당했던 김기남 사장에게 반도체 총괄 및 시스템LSI 사업부장을 맡기는 인사를 실시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 시스템 반도체시장에서 11.5%의 점유율을 기록해 인텔의 14.3%를 바짝 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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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제츠 중국 국무위원이 지난해 11월 경기 화성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나노 시티'를 방문했다.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양제츠 중국 국무위원, 전동수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사장,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뉴시스> |
◆ 융복합 시대, 사물인터넷에서 미래를 찾을 수 있을까
사물인터넷은 삼성전자가 이재용체제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는 분야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8일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제품과 기술이 융합되고 있다”며 “사물인터넷이 대표적인 융복합 기술이 필요한 분야”라고 말했다.
사물인터넷이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모든 기기에 센서를 붙여 인터넷으로 연결해 스마트기기를 만드는 것을 뜻한다. 애플이나 구글 등 IT분야의 글로벌기업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물인터넷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사물인터넷시장은 생활가전을 비롯해 자동차, 의료 등 무궁무진하다.
미래창조과학부의 자료를 보면 사물인터넷 세계시장 규모는 지난 해 202조 원에서 오는 2020년 1010조 원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우리나라 사물인터넷시장은 2조 원에 불과한데 오는 2020년까지 17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가 웨어러블(입는 컴퓨터) 기기 시장이나 스마트홈시장에서 선도자의 입지를 굳히고자 하는 것도 사물인터넷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것이다.
신종균 IM(IT 및 모바일)부문 사장은 지난 2월 “올해부터 웨어러블기기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할 것"이라며 "웨어러블기기 시장의 마켓 크리에이터라는 책임을 갖고 시장성장을 주도해 실적에 확실히 기여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5월까지 미국시장에서 판매된 스마트워치 시장에서 78%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해 1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질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은 “갤럭시 기어(스마트워치)는 내가 경험해 보려다가 반나절만에 바로 되팔아버린 유일한 제품”이라고 혹평했다. 애플이 하반기에 아이워치를 오는 10월 내놓을 경우 웨어러블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이런 우위를 유지할지 장담하기 어렵다.
윤부근 소비자가전부문 사장은 스마트홈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윤 사장은 지난 1월 국제가전전시회(CES)에서 “거실에서 가족들이 시청하는 TV쇼를 요리하는 당신도 주방가전 스크린을 통해 즐기는 모습을, 스마트폰을 집어들지 않고도 걸려 오는 전화를 냉장고로부터 받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윤 사장은 “올해가 스마트홈에서 혁신의 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한국 미국 영국 등 11개국에서 TV 에어컨 청소기 등 집안 가전기기들과 스마트폰 등 IT기기들을 통합 플랫폼으로 연동시키는 ‘삼성 스마트홈 서비스’를 내놓았다.
문제는 삼성전자의 소프트웨어 능력이다. 삼성전자가 사물인터넷시장으로 가기 위해 웨어러블기기 시장이나 스마트홈시장에서 선도자 역할을 차지하려고 노력해도 소트프웨어 역량이 뒷받침어야 한다는 지적이 강하게 나온다.
삼성전자가 소프트웨어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면 스마트폰시장에서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종속되는 상황이 앞으로도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프트웨어 능력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삼성전자는 14일 자체 운영체제인 타이젠을 탑재한 스마트폰 ‘삼성Z’의 출시 행사를 취소했다. 타이젠폰 출시가 미뤄진 것은 벌써 세 번째다. 업계는 타이젠 운영체제에서 구동되는 앱들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본다.
미국 IT전문매체인 씨넷은 “삼성전자는 새로운 운영체제에 대해 영원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며 “개발자들은 실제 사용자가 없는 스마트폰을 위해 앱을 개발하지 않으려 하고 소비자들 또한 앱이 없는 스마트폰을 구입하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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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 이재용의 헬스케어사업, 이번엔 성공할까
이건희 회장은 2010년 5대 신수종사업을 선포하고 2020년까지 23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5대 신수종 사업이란 태양전지, 자동차전지, LED, 바이오, 의료기기를 말한다.
특히 이재용 부회장은 바이오 의료기기를 통한 헬스케어사업을 중점과제로 선택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을 승계받을 당시 반도체를 핵심사업으로 삼았던 것처럼 이재용 부회장은 헬스케어사업을 선택한 것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4월 중국에서 열린 보아오포럼에서 “고령화 문제에 직면한 전 세계 대다수 국가에서 의료비 지출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며 “의료비를 낮출 솔루션을 찾아낼 수 있다면 엄청난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장 잠재력이 큰 헬스케어시장을 스마트기기와 의료기기, 바이오 의약품 등을 서로 연결해 매출을 한꺼번에 가져오겠다는 전략을 제시한 셈이다.
헬스케어 사업의 중심에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메디슨이 있다.
삼성전자는 2011년 의료기기회사인 메디슨의 지분 66%를 5천억 원에 사들였다. '서울대 벤처1세대'로 불리는 이민화 사장이 1985년 세운 회사다. 세계 최초로 ‘3D 초음파 진단기’를 개발했고 이 진단기는 국내 1위(33%), 세계 5위(7%)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메디슨을 인수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이렇다 할 실적은 나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지난해 매출액은 2680억 원을 기록해 전년보다 100억 원 이상 줄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42억 원으로 전년 대비 4분의 1로 감소했다. 삼성그룹은 삼성메디슨에 대해 경영진단을 벌이고 향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전자와 삼성에버랜드가 2011년 각각 42.55%씩 지분을 출자해 설립한 회사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 5월 영국 바이오업체 주식의 절반을 725억여 원에 인수하기도 하는 등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적자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매출 4350만 원에 그쳤고, 영업손실은 1464억 원을 기록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부터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업을 부쩍 챙기고 있다. 지난해 4월 방한한 글로벌 2위 제약사 머크의 케네스 프레이저 회장에게 삼성의 반도체 공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당시 “삼성이 머크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빨리 약을 생산할 수 있다”고 설득했고 지난 4월 머크와 바이오시밀러(복제약)를 개발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전 세계 의약품시장은 1천조 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바이오 의약품은 200조 원으로 초고속성장하는 추세다. 이 때문에 삼성그룹도 바이오의약품 사업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바이오시밀러 개발은 수십년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신 시킹알파는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서 가장 앞선 셀트리온은 삼성이 개발하고 있는 바이오시밀러의 개발을 이미 마치고 판매허가도 받았다”고 지적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출범시기와 배경들이 14년 전 e삼성이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다”며 “이 부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삼성에버랜드가 과감히 투자하는 만큼 이번에 이 부회장이 경영능력을 보여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