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소노미는 ESG경영의 환경(E) 분야에서 무엇이 녹색활동인지 판별하기 위해 마련된 기준이다. 녹색활동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기업활동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도록 기업환경이 변하고 있는 만큼 택소노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유럽에서 마련되고 있는 EU 택소노미는 한국 기업들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사진은 EU 택소노미 관련 UN 책임투자원칙(PRI) 유튜브 영상 갈무리. |
[비즈니스포스트]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는 국내에서 주로 에너지정책, 특히 원전과 관련해 회자된 단어다. 그러다 보니 어렴풋하게 택소노미를 원전 관련 용어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린 택소노미는 친환경, 녹색활동을 정의하는 기준으로 '녹색분류체계'라고도 불린다. 단순히 에너지 분야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대세가 되고 특히 환경(E) 분야에서 녹색활동이 강조되면서 무엇이 녹색활동인지 혹은 아닌지 판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됐다.
녹색활동에 해당하는 기업의 활동이 투자 유치를 비롯해 각종 환경 관련 규제 등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변화가 세계적 흐름인 만큼 그린 택소노미는 공시의무는 물론 산업활동 전반에 걸쳐 기업환경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는 규범으로 볼 수 있다.
택소노미를 마련하는 데 가장 앞서 있는 지역은 유럽이다.
유럽연합(EU)은 2018년부터 택소노미 도입을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이미 환경 관련 일부 규정들은 규범화됐고 사회(S) 분야 택소노미 등 추가적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서 만들어지는 기준이 우리와는 어떻게,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비즈니스포스트는 BNZ파트너스의 임대웅 대표와 정진 SB본부 본부장을 만나 EU 택소노미의 영향력과 국내에 미치는 영향, 국내 기업들의 대응 방향 등을 물었다.
BNZ파트너스는 넷제로 정책, 전략 전문기관이자 기후기술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액셀러레이터 즉 창업기획사다. 2019년 12월 본사인 에코앤파트너스의 기후환경본부가 기업분할돼 설립됐다.
탄소배출권거래제 설계, K-택소노미 개발, 넷제로 및 TCFD 전략 수립, 녹색금융 전략 및 상품 개발, RE100 자문 및 투자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K-택소노미 기반 스타트업의 발굴, 투자, 육성을 위한 펀드(벤처투자조합)을 출시했다.
▲ 기업이 알아야 할 주요 ESG 관련 제도 도입 일정. <비즈니스포스트> |
◆ ESG공시 중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영향 줄 EU 택소노미
임 대표는 “EU 택소노미는 기업들의 공시의무와 관련해서는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규범”이라고 말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의 공시기준은 빠르면 2025년 적용된다. EU 지속가능성보고표준(ESRS)은 2024년에 시작해서 2026년까지 구체적 적용이 시작되는데 EU 택소노미는 이미 2022년부터 시작이 됐다.
임 대표는 EU 택소노미가 비교적 먼저 정립되는 기준인 만큼 이후 만들어지는 다른 기준들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 본부장은 “결국에는 EU 택소노미가 다른 기준에도 녹아들어 갈 것”이라며 “최종적으로는 각 기준들이 통합된 포괄적 기준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EU 택소노미는 △기후변화 완화 △기후변화 적응 △수자원, 해양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 및 보호 △순환 경제로의 전환 △오염 방지 및 관리 △생물다양성과 생태계 보호 및 복원 등 6대 환경목표를 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기후변화 완화, 기후변화 적응 관련해서는 이미 경제활동 목록이 마련됐으며 원전 등이 포함된 개정안이 2023년 1월1일부터 시행된다.
2023년 1월 중에는 나머지 네 가지 환경목표의 경제활동 목록도 발표된다.
◆ 유럽 진출기업, 수출기업 허위 공시 땐 민형사상 책임
EU 택소노미는 유럽연합에서 만들지만 국내 기업과도 무관하지 않다.
유럽에 수출하는 기업이나 영업점, 생산시설 등으로 현지에 진출한 기업이 모두 EU 택소노미의 영향권에 있기 때문이다
임 대표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을 예로 들면 블랙록은 미국 기업이지만 유럽에 지사를 두고 있으니 EU 택소노미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블랙록은 한국 기업에 투자할 때 EU 택소노미에 따른 매출, 투자성과 등 택소노미 관련 정보를 요구할 것이고 한국 기업들은 투자를 받으려면 여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택소노미의 기준에 따른 공시는 사실상 강제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정 본부장은 “택소노미 자체에는 별다른 처벌규정이 없다”면서도 “하지만 공시와 연결되면 부실, 허위 공시가 되면서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내년부터 EU 택소노미에 따른 공시의 요구 수준이 기존보다 높아진다는 점은 당장 기업들이 챙겨야 할 현안으로 보인다.
2022년까지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사업 가운데 어느 부분이 택소노미의 경제활동 대상에 해당하는지만 공시하면 됐다.
하지만 2023년부터는 사업의 어느 부분이 택소노미 경제활동 대상(eligible)인지, 택소노미 경제활동 목록의 대상인 사업이 요구되는 기준을 충족(aligned)하는지, 택소노미 경제활동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은 어느 정도인지 모두 공시해야 한다.
기업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택소노미의 대상은 되지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업 부분이다.
이런 사업은 택소노미에 따라 ‘진정한 녹색사업’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해당 사업에서 발생하는 매출과 투자비중을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발전 사업을 하지만 재생에너지가 아닌 화석연료 관련된 사업이다.
수소이지만 녹색수소가 아닌 화석연료 기반인 그레이수소, 인터넷데이터센터(IDC)이지만 ‘그린IDC’ 인증을 받지 못한 IDC 사업들도 택소노미의 대상은 되지만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업이다.
▲ 임대웅 BNZ파트너스 대표는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에서 “EU 택소노미는 앞으로 기후변화 대응의 열쇠가 될 것”이라며 “EU 택소노미 대상이 되는 한국 기업들은 내년부터 사업 부문에 따라 ‘사업의 녹색성’ 관련 데이터를 쌓기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 '진정한 녹색사업'으로 인정 받는 조건, 인증과 데이터
또 다른 문제는 공시를 위한 데이터 확보다. 기존 공시 체제에선 추정해서 공시할 수 있던 부분도 EU 택소노미가 적용되면 실제 데이터를 공시해야 한다.
기후변화 관련 정보 공시가 실례다. 지금까지 기업들이 기준으로 삼았던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 공개 협의체(TCFD)’ 공시에서 금융대출량 정보는 추정공시였다. 업종별 산업연관표 기준에 따라 매출당 탄소배출량을 추정해서 공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EU 택소노미에 따라 공시를 하려면 추정으로는 불가능하다. 사업 부문에 따라 택소노미에 해당되는지 여부가 다르기 때문이다.
임 대표는 “EU 택소노미는 앞으로 기후변화 대응의 열쇠가 될 것”이라며 “EU 택소노미 대상이 되는 한국 기업들은 내년부터 사업 부문에 따라 ‘사업의 녹색성’ 관련 데이터를 쌓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에선 탄소배출권 거래제 대상기업 700여 곳 외에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탄소배출 데이터를 관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택소노미가 단순한 공시의 기준이 아니라 녹색활동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인 만큼 기업의 활동이 얼마나 녹색활동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따라 투자, 여신을 받는 데에도 차이가 생긴다.
기업의 사업 가운데 녹색활동에 포함되는 비중이 클수록 사업성 측면에서 유리해진다는 의미다. 그린본드 등 조달비용이 유리한 녹색자금을 통한 투자 혹은 여신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 본부장은 “투자, 여신 관련 불이익은 유럽에 수출하거나 생산시설을 통해 진출한 기업에도 영향을 주는 만큼 내년부터 녹색활동 비중을 조절하기 위한 실적 관리가 필요할 것”이라며 “노르웨이 연기금 등 유럽지역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받는 한국 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기업의 사업이 택소노미 경제활동 대상에서 적합한 활동 조건을 충족하는 일은 녹록지 않다.
EU 택소노미의 경제활동 대상이 녹색활동 기준을 충족하려면 △6대 환경목표 가운데 하나 이상에 상당한 기여(substantial contribution)를 해야 한다. 또한 △나머지 환경목표에 심각한 피해(do no significant harm)를 주지 않아야 하며 △최소한의 사회적 보호장치(minimum social safeguards)를 준수해야 한다. 즉 세 가지 판단 기준 모두 만족해야 한다.
▲ 정진 BNZ파트너스 SB본부 본부장은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에서 EU 택소노미가 국내 기업에 미칠 파급력을 놓고 "노르웨이 연기금 등 유럽지역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받는 한국 기업 역시 EU 택소노미의 적용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
◆ 재생에너지라 해도 '최소한의 사회적 보호조치'해야 녹색활동
EU 택소노미의 경제활동 대상이 녹색활동 기준을 충족하는 과정을 놓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기술보고서(technical report)에는 석탄발전, 수력발전, 풍력발전 등을 예시로 들어 설명한다.
어느 기업이 석탄발전 시설을 설치하려 한다면 석탄발전 사업 자체가 택소노미의 경제활동 대상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환경목표에 상당한 기여’ 단계에서 탈락한다.
수력발전은 택소노미의 경제활동 대상에 해당되기는 하나 발전량 당 탄소배출량 (CO
2e/kWh) 기준치를 만족해야 상당한 기여를 인정받을 수 있다. 보고서에서는 조건을 충족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후속 판단은 하지 않았다.
풍력발전은 사업종류 그 자체로 택소노미 경제활동 대상이고 상당한 기여까지 만족한다.
다음 단계는 ‘다른 목표에 심각한 피해’ 여부다. 이와 관련해 해당 풍력발전이 시설의 설치 과정에서 소음, 오염, 생물다양성 등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마지막 단계인 ‘최소한의 사회적 보호조치’ 판단으로 넘어갈 수 있다.
사회적 보호조치 단계는 UN 기업인권 이행원칙(UNGP),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등을 바탕으로 풍력발전 사업이 관련 내용을 준수하면서 진행되는지 판단한다. 이를 통과한다면 유럽 표준산업분류(NACE)에 따라 풍력발전 사업은 매출의 50%를 녹색활동으로 인정받는다.
◆ 2023년부터는 '좋은 일' 아니라 '비즈니스'여야 ESG
그렇다면 기업들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임 대표는 “먼저 자신의 사업에서 각 부분이 EU 택소노미의 경제활동 대상에 해당하는지 혹은 해당하지 않는지, 각 부분별로 녹색사업 관련 매출, 자본적 지출(CAPEX), 운영비용(OPEX) 등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에는 택소노미에 포함되는 영역의 비중을 늘리고 신규 투자를 할 때도 택소노미 해당 여부를 고려해 투자를 확장해야 한다.
각 기업이 택소노미를 비롯한 ESG경영으로의 전환이라는 흐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각자의 사업으로 내제화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도 임 대표는 강조했다.
임 대표는 “택소노미는 물론 ESG경영으로 사업을 해서 수익을 내야지 돈 버는 곳 따로, ESG경영한다고 돈 쓰는 곳 따로가 돼서는 안 된다”며 “지금까지는 친환경 혹은 ESG가 그냥 그 자체로 좋은 일로 치부되면서 기업의 사업에 충분히 통합되지 못했지만 내년부터는 ESG로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느냐로 기업이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바라봤다. 이상호 기자
[편집자주] “최근 높아진 ESG 압박의 90%는 기후에 관한 것이다.” 한 ESG 전문가가 말했다. 전 세계 회계기준을 만드는 국제회계기준 재단은 기후 관련 재무정보공개 태스크포스(TCFD) 공시 기준에 기반한 ESG 공시 기준을 2023년 공표한다. ‘기후패권’을 장악한 유럽연합은 'EU택소노미, 공급망 실사 지침, 탄소국경세’ 3종 세트로 전 세계 기업들로부터 탄소중립 전략을 이끌어내고 있다. 2023년 이후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까. 비즈니스포스트는 분야별 ESG 전문가들을 만나 총 4회에 거쳐 ESG공시와 평가, EU택소노미, 공급망 실사지침 등 ESG 핫이슈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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