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는 탄소배출에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2023년 1월부터 시범운영이 시작된다. 사진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서구 선진국이 탄소로 쌓는 무역장벽이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다.
이제까지는 국제사회가 탄소 감축 관련 의제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움직였으나 최근 들어선 각국과 주요 대기업들이 국제무역 측면에서 관세 부과, 공급망 배제 등 실효성 있는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전자는 사용하는 에너지를 모두 재생에너지로 전환하지 않으면 2020년 기준으로 전체 매출의 43%에 이르는 반도체칩 등 B2B 매출이 20% 수준으로 줄면서 25조8천억 원 규모의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인정한 바 있다.
로이터가 2021년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 Carbon Disclosure Project)를 통해 공개한 자료에서 삼성전자는 “우리 고객들은 100% 재생에너지로 제품을 생산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며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우리 매출에 분명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대표적 탄소 무역장벽의 수단으로 꼽히는 탄소국경세, RE100, 탄소배출 공시를 짚어본다.
◆ 내년부터 유럽연합, 미국에서 시작될 탄소국경세
탄소중립이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면서 이제는 ‘탄소배출’을 관세의 새로운 부과 기준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구체화 되고 있다.
탄소배출을 대상으로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탄소배출 규제가 약한 개발도상국의 제품에 가격 경쟁력이 발생하는 상황을 막겠다는 의도다.
관세는 예나 지금이나 무역장벽의 핵심이다. 국가의 재정수입 증대, 자국 산업보호 등을 이유로 시대변화에 따라 다양한 요소를 기준으로 부과돼 왔다.
유럽연합(EU)에서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미국에서는 청정경쟁법안(CCA, Clean Competition Act)을 놓고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는 당장 2023년 1월부터 시범운영이 시작되는 만큼 현재 시점에서 가장 실체화가 임박한 탄소 관세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3년의 시범운영 기간이 지나면 2026년 1월부터는 전면적으로 도입된다.
문제는 규제 강도다. 올해 유럽연합 의회 수정을 거친 전면 도입안은 2021년 7월에 공개됐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초안보다 규제 품목의 수가 늘어나는 등 더욱 강화됐다.
최종안은 집행위원회까지 포함된 3자간 합의를 거쳐 올해 내 도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규제 확대 조짐이 보이자 국내 기업들은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올해 9월28일 로베르타 메촐라 유럽연합 의회 의장 등 주요 인사들에게 “탄소국경조정제도의 규제품목 확대는 양국 교역관계 및 탄소중립 목표달성을 고려해 신중히 결정돼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탄소를 기준으로 부과되는 관세 장벽이 마련되고 있다.
미국 상원에는 올해 6월에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와 유사한 청정경쟁법안(CCA, Clean Competition Act)이 발의된 상태다.
이 법은 석유화학제품 12개 수입품에 대해 온실가스 배출 1톤당 55달러를 관세로 부과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EU CBAM과 세부적인 제도설계는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탄소중립을 명분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취지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는 7월 내놓은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유럽연합과 미국의 탄소 관세에 피해를 볼 수 있다”며 “기존의 자유무역협정(FTA)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을 통한 해결책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유환익 전경련 산업본부장은 비즈니스포스트와 전화 인터뷰에서 "유럽연합과 미국에서 탄소통상규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제조업과 수출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우리 경제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은 정부 차원의 지원과 외교 통상적인 노력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장 내년부터 우리 수출기업들이 유럽연합 기준에 부합하는 배출량 데이터를 산정해 제출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정부는 배출량 산정을 위한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낡은 데이터베이스(DB)를 업데이트하겠다고 했지만 다종다양한 수출 제품군을 포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은 "미국과 유럽이 각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녹색보호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최우방 파트너와는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 긴밀히 실무적 조율을 진행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도 우려 전달에 머물지 말고 다각적 채널을 동원해 우리 경제의 이해관계를 선제적으로 대변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 RE100은 민간 차원의 자발적 탄소중립 움직임이지만 기업에 관세 못지 않은 강력한 압박을 주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올해 9월 RE100을 선언하는 등 국내 기업들의 RFE100 참여도 본격화되고 있다. 사진은 한종희 삼성전자 DX부문장이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2'에서 '미래를 위한 동행'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삼성전자> |
◆ 관세만큼 강력한 민간의 ‘자발적’ 캠페인, RE100
탄소 관세가 정부 차원에서 구축되는 장벽이라면 RE100은 민간 차원에서 세워지는 장벽이다.
RE100은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Renewable Electricity)로 충당하자는 캠페인이다.
영국의 비영리단체인 ‘더 클라이밋 그룹(The Climate Group)’이 시작했으나 세계적으로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비롯해 380여 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RE100에 참여하는 미국, 유럽 등 서구권 주요 기업들은 거래 대상 기업에도 RE100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RE100을 달성하지 못하면 RE100 선언 기업들과의 가치사슬에서 배제되는 효과가 나게 된 만큼 RE100은 민간 차원의 자발적 캠페인이지만 정부 차원의 환경 규제보다도 강력하게 국내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올해 9월 RE100을 선언한 데에도 서구권 주요 기업들의 압박이 작용했다.
송두근 삼성전자 부사장은 10월 20일 열린 탄소중립녹색성장국제콘퍼런스에서 “굉장히 당황스럽기도 하고 긴장이 된다”며 “아마존, MS 등 고객사들의 요구가 높아 재생에너지로 반도체칩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서구권에서도 RE100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있다.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만으로는 기업들의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만큼 원자력, 연료전지 등 탄소중립적 전원까지 포함하는 ‘CF(Carbon Free) 100’이 더욱 현실적 목표라는 것이다.
CF100은 구글을 비롯해 유엔 에너지(UN Energy), 지속가능에너지기구(SE4ALL) 등 국제기구가 주도하는 데다 RE100보다는 달성 난이도가 낮아 국내 산업계에서는 CF100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는 2일 열린 ‘탄소중립 미래를 위한 RE100 국제콘퍼런스’ 패널토론에서 “RE100은 전 세계 캠페인이지만 국가별 재생에너지 가격 등이 상이하므로 국가별 여건을 고려하여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탄소중립을 위해 실시간 사용 전력의 무탄소화를 목표로 하는 CF100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 탄소배출을 대상으로 관세를 부과하거나 RE100 달성 여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표준화된 공시가 필수적이다. 현재 국제회계기준(IFRS)재단 산하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지속가능성 공시의 표준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에마뉘엘 파베르 국제지속사능성기준위원회 위원장(앞 줄 오른쪽 두 번째)이 10월25일 한국 기업인들과 만나 좌담회를 한 뒤 기념촬영을 한 모습. <한국회계기준원> |
◆ 국제회계기준처럼 세계 기준 될 탄소배출 공시
탄소국경세와 RE100이 실효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먼저 기업의 탄소배출이 정확하고 공신력 있게 파악되고 공유돼야 한다.
재무제표 작성에 대한 국제적 기준을 만드는 국제회계기준(IFRS)재단은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제정을 위한 국제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 재단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올해 3월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가운데 S1(일반), S2(기후분야) 등 초안을 내놓고 각국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쳤다.
10월25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에서 열린 총회와 공개세미나 자리에서도 이 재단은 지속가능성 공시기준과 관련한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의견을 청취했다. 이에 따라 올해 말에는 최종안이 공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 기후 분야 기준은 윤곽이 나왔다. 이 재단은 지난 8일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를 기후 관련 공개 표준(S2)에 통합한다고 발표했다.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는 전 세계 1만8700여 개 기업의 환경 경영 정보를 금융기관 등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국제기구다. 이 기구가 공개한 정보를 참조하는 금융기관은 전 세계 680개, 그들의 총 자산을 합치면 130조 달러가 넘는다.
전문가들은 이 재단이 마련한 국제회계기준이 재무지표 공시의 세계 표준으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과 기후 관련 공개 표준 역시 세계적으로 ESG 관련 비재무적 지표의 공시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올해 말 공개될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에서 핵심 쟁점은 기업이 탄소 배출을 어디까지 공시해야 하냐는 점이다.
탄소배출 공시 범위는 기업의 직접배출만 포함하는 스코프(scope)1, 직접배출에 더해 간접배출까지 포함하는 스코프2, 직접배출과 간접배출은 물론 기업의 협력사 등 외부배출까지 포함하는 스코프3로 분류된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는 스코프3 수준의 공시를 요구하는 기준안을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들은 제조업 중심인 데다 다양한 협력사가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아 스코프3 수준의 공시에는 강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
금융위원회 역시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의 초안을 놓고 “비용과 효익의 균형을 고려해 스코프3 공시는 해당 정보가 중요한 특정 산업에서만 요구하는 방안을 제안한다”며 “중소기업은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 의무의 적용을 제외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스코프3 수준의 공시를 관철하려는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의 의지는 강해 보인다.
현재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초대 위원장은 에마뉘엘 파베르다.
파베르 위원장은 프랑스의 세계적 식품기업 다논의 전 CEO다. 다논 CEO로 재임 중에는 강력한 ESG 정책을 펼친 끝에 상장기업 최초로 다논이 ‘사명을 다하는 기업(Entreprise à mission)’ 지위를 획득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논에 헤지펀드 등 투자자들이 주요 주주로 등장하고 코로나19 확산 이후 다논의 실적이 부진해지면서 파베르 위원장은 결국 2021년 3월에 다논 CEO 자리를 내놓게 됐다.
영미권 펀드의 압박에 따른 파베르 위원장의 사퇴를 놓고 프랑스 언론 리베라시옹은 “파베르가 시장의 법칙에 부딪쳐 잔인하게 해고됐다”, 르몽드는 “프랑스 자본주의 심장에 내려진 또 하나의 벼락”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파베르 위원장이 다논에서 실패를 겪은 뒤 바로 다음 행보로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를 선택한 만큼 스코프3 등 강도 높은 ESG 공시 기준 마련에 공을 들일 가능성이 크다.
서울총회 참석차 방한했던 파베르 위원장은 10월27일 열린 ‘글로벌 ESG 공시 관련 기업 좌담회’에서 한국 기업인들을 만나 “스코프3와 관련해 기업의 어려움은 인지하고 있다”면서도 “국가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스코프3 공시는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도 지속가능성 관련 공시를 통한 자본비용의 감소 효익을 추구할 필요도 있다”며 공시 효과를 강조했다.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 한국위원회의 사무국을 맡고 있는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에 따르면,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뿐 아니라 유럽연합의 유럽재무보고자문그룹(EFRAG),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도 스코프3 의무화를 계획하고 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국장은 "스코프3를 통해 공급망 등 외부배출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지 않으면 탄소중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시 의무와 별개로 이미 시장에선 스코프3 수준의 강력한 기준을 공급망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다국적 은행 스탠다드 차타드가 지난해 다국적 기업 400개사의 지속가능성 및 공급망 최고책임자들을 설문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15%의 기업이 자사의 탄소 전환 계획을 위태롭게 하는 공급망과 이미 계약을 해지했다고 밝혔다. 또 78%의 기업이 '2025년까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공급망과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응답했다.
이 국장은 "이런 세계 동향을 고려하면 우리나라도 국내 기업들의 공급망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스코프3를 공시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호 기자
[편집자주]
‘1억5760만 톤(CO2eq).’ 2030년까지 한국의 에너지와 산업 부문이 줄여야 하는 온실가스량이다.
‘온실가스 배출 1톤당 55달러.’ 미국이 2024년부터 석유화학제품 등 12개 수입품에 매기겠다는 관세다.
‘20조 원’.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포스코가 투자해야 하는 금액이다.
탄소전쟁이 시작됐다.
온실가스 감축을 빌미로 선진국들은 관세로, 공시로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다. 중국은 저탄소 기술과 넓은 대지를 기반으로 저탄소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한국은 무엇에 대비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제27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 기간을 맞아 우리 기업들이 온실가스 감축과 함께 준비해야 할 도전과제들을 4회에 거쳐 살펴본다.
[탄소전쟁](1) 삼성전자도 '긴장 당황', 탄소 앞세운 경제전쟁 막 올랐다
[탄소전쟁](2) 탄소중립에 산업의 '전기화' 불가피, 한전 감당할 수 있나
[탄소전쟁](3) 삼성전자도 대응 안 하면 25조 손실 본다는 '이것'
[탄소전쟁](4) 탄소전쟁 예견 박호정 고려대 교수 "성장자본 축적으로 대응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