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북미 이외 지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한 정책을 두고 유럽연합(EU)에서 강력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도 미국이 차별적 정책을 도입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으며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세계 주요 전기차 생산기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미국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차별 지급 정책을 두고 유럽연합(EU)과 세계무역기구(WTO)가 일제히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사진은 현대차 울산공장 아이오닉5 생산라인. |
8일 미국 CNBC에 따르면 유럽연합은 최근 공식 문서를 통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으며 국제무역원칙 위반 소지가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유럽연합 당국 관계자들은 미국 정부에 보내는 공식 문서에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지원 정책 가운데 9개 조항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최종적으로 생산되지 않은 전기차와 중국산 부품 및 소재를 일정 비중 이상 탑재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에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CNBC를 통해 “미국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태스크포스를 조직했다”며 “미국이 적극적으로 논의에 참여하기 바란다”고 전했다.
유럽연합 관계당국의 다른 고위 인사들도 미국이 유럽을 동등한 무역 파트너로 존중해야 할 것이라며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따른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을 추진할 때부터 유럽연합은 이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런 정책이 공정무역 원칙을 위반하는지 여부를 두고 검토도 이뤄져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럽연합 고위 관계자들이 나서 미국 정부에 직접 의견서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다소 강경한 대응이 이뤄지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도 CNBC와 인터뷰를 통해 “미국은 차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무역정책을 도입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미국이 자국 및 북미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다른 국가를 차별하는 정책에 해당하는 만큼 다른 국가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CNBC는 “유럽 이외에 한국도 미국 정부를 향해 전기차 보조금과 관련한 부정적 의견을 내놓고 있다”며 “현지 자동차기업이 무역장벽에 부딪힐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전기차 보조금 정책 변화로 한국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기아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로 지목된다.
현대차와 기아가 미국에서 전기차 판매량 상위권에 자리를 잡으며 중요한 성장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따라 보조금을 받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기아는 미국 자동차공장에 전기차 생산라인 신설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고 현대차는 최근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생산공장 착공식을 개최하며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다.
▲ 현대자동차 전기차 주력모델 '아이오닉5'. |
그러나 미국에 전기차 생산라인이 들어서는 수 년 뒤까지 현지에서 전기차를 생산해 판매하며 보조금을 받는 포드와 GM, 테슬라 등 기업을 상대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현대차는 한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미국이 전기차 보조금 차별적 지급 정책을 재검토하거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 시기를 늦춰야 한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연합과 세계무역기구 등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기관이 현대차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면서 지원군을 얻게 된 셈이다.
현지시각으로 8일 이뤄지는 미국 중간선거를 계기로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지급 정책에 다시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도 고개를 들고 있다.
바이든 정부에서 추진한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은 상원 및 하원에서 야당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여당인 민주당의 찬성을 거쳐 일방적으로 통과됐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며 승리할 가능성이 유력하게 점쳐지는 만큼 바이든 정부의 정책 추진 동력이 다소 힘을 잃게 될 수 있다.
바이든 정부가 의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전기차 보조금 정책을 포함한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안에 어느 정도 수정을 검토해야만 할 가능성도 충분한 셈이다.
현대차와 기아는 물론 한국 정부와 유럽연합, 세계무역기구가 모두 미국 중간선거 뒤 새 의회 구성을 계기로 미국 정부를 향해 더 강력한 요구를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로이터에 따르면 일본 정부도 최근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미국 경제에 오히려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정부 차원의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미국 하원의원들이 11월 초 전기차 보조금 지원 조건을 완화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등 미국 정치권에서도 바이든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관련한 회의적 시각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김용원 기자